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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요나의 교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19 조회수8,388 추천수4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요나의 교훈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카나로 가는 도중에 요나의 고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시던 날도(요한 2,1-2 참조), 그곳을 지나시며 요나를 떠올리셨을 것 같다. 오늘날 마을 이름이 ‘마쉬헤드’이지만, 요나 시대에는 ‘갓 헤페르’라 했다. 갓 헤페르가 갈릴래아 지방 성읍이니, 요나도 예수님처럼 갈릴래아 사람이었던 셈이다.

 

요나의 고향은 2열왕 14,25에 나온다. “그(예로보암 2세)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 이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갓 헤페르 출신으로 당신의 종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다.” 이 구절은 요나가 북왕국 예언자이며, 예로보암 2세 시대(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북왕국이 영토 회복에 성공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요나는 아모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요나서도 아모스서처럼 열두 소예언서에 속한다. 그러나 예언서 안에서 요나가 선포한 신탁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라는 경고가 전부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예언서라기보다 요나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를 뜻하는데, 실제로 그는 비둘기처럼 어리석은(호세 7,11 참조) 모습을 보였다. 주님께서 땅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알면서도, 그분의 부르심을 피해 바다로 도망가려 했다.

 

 

니네베로 파견되다

 

주님께서 요나를 파견하신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고대 근동을 주름잡은 열강이었다. 기원전 722년에는 북왕국까지 무너뜨린다. 니네베가 아시리아의 수도가 된 것은 산헤립(기원전 701년 유다 왕국을 공격한 임금) 시대였지만, 그전부터 니네베는 역사가 유구한 성읍이었다.

 

성경에는 대홍수 뒤 니므롯이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창세 10,11-12: “그[니므롯]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가서 니네베와 르호봇 이르와 켈라를 세우고, 니네베와 큰 성읍 켈라 사이에 레센을 세웠다”). 위치는 티그리스 강 근처로서, 이라크 북부 지방인 모술과 가깝다.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바빌론에 의해 무너지는데,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요나가 묻힌 곳도 니네베라 한다.

 

요나가 니네베로 가게 된 것은 주민들의 죄악 때문이었다(요나 1,2 참조). 죄악은 히브리어로 ‘라아’라고 한다. ‘곤경’ 또는 ‘재앙’이라는 의미도 포함하는 말이다. 곧, ‘죄악’과 그 죄악의 결과로 닥치는 ‘곤경’을 모두 함축한다. 니네베의 악행이(나훔 3,1.19 등 참조) 재앙을 불러들여, 주민들을 곤경에 빠뜨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다. 요나는 하느님 백성도 아닌 이민족에게, 그것도 악한 니네베에게 그러한 기회는 가당치 않다고 여겼다. 더구나 예로보암 2세 시대 북왕국은 승승장구하였기에,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니네베의 구원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죄를 벌하실 때 아시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셨고(이사 10,5-6 참조), 그 때문에 북왕국이 기원전 722년 몰락을 맞게 된다. 그것을 미리 알고 요나가 달아난 것일까? 자기가 사라지면 하느님께서 포기하시거나 다른 예언자를 보내시리라 여겼나 보다.

 

더욱이 니네베까지 가는 여정도 녹록하지 않았다. 에즈 7,9에 따르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다섯 달쯤 걸렸다고 하니, 니네베도 비슷했을 것이다.

 

 

타르시스행 배를 타다

 

요나는 하느님의 눈에서 벗어나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요나 1,3 참조). 당시 이스라엘에서 세상 끝처럼 여겨지던 지역이 바로 타르시스였기 때문이다(이사 66,19 참조). 지중해 건너편에 위치한 스페인 남쪽의 ‘타르테수스’ 유적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동쪽 끝에 있는 니네베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곧, 요나는 니네베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다와 뭍을 만드신”(요나 1,9) 주님이신데도, 요나는 바닷길로 도망치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도로 불러들이시려고 폭풍을 보내신다.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자 선원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의 이름을 불렀다(요나 1,5 참조). 이는 배 안에 다양한 민족 출신들이 섞여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곧, 이 배는 바벨탑 이후 민족들이 언어별로 흩어진 세상의 축소판 같은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 요나만 아브라함처럼 참 하느님을 섬겼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종족이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되듯(창세 12,3 참조), 요나 사건을 통해 참 하느님의 존재가 많은 민족에게도 드러나리라는 복선이 된다.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재앙의 원인이 요나라는 걸 알아내는데, 성경에서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뜻을 계시받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제비를 뽑았다(민수 36,2 참조). 또한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사도(마티아)를 선출할 때도 같은 방법을 썼다(사도 1,26 참조).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는 구절대로다.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바다로 몸을 던지자 물고기가 그를 잡아먹게 하시어, 물고기 배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가두어 두셨다.

 

 

니네베의 회개

 

요나는 처음 바다에 빠졌을 때, 주님께 불순종한 자기를 죽은 목숨으로 여긴 듯하다(요나 2,7ㄱ: “저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고 땅은 빗장을 내려 저를 영원히 가두려 하였습니다.” 참조). 그런데 뜻밖에 물고기 배 속에 안착하자 자신이 살아있음을 절절히 느끼고, 하느님께서는 징벌보다 용서를 즐기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사흘을 지내는 동안 요나가 자숙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물고기가 그를 육지로 토해내었다.

 

그래서 아직 마음이 썩 내키는 건 아니었지만, 요나는 니네베로 걸음을 옮겨 그들이 사십 일 뒤 무너질 운명이라고 경고해 주었다(요나 3,4). 사실 그가 선포한 신탁은 니네베를 심판하는 내용이라서 주민들이 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언자들이 자기들을 꾸짖거나 재앙을 선포할 때는 듣기 싫어했다.

 

니네베에서도 요나는 적대적 반응을 예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터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말을 너무 잘 듣는 것이었다. 임금부터 백성까지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참회했다. 자루옷은 죽음이나 국가적 재앙을 애도할 때 입던 고행의 의복이다(창세 37,34; 예레 48,37 등 참조).

 

염소나 낙타의 털로 만들어 색이 어둡고 질감이 거칠다(묵시 6,12: “해는 털로 짠 자루옷처럼 검게 되고” 참조). 곧, 니네베는 요나의 심판 신탁을 모욕으로 듣지 않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니네베를 구원받게 했다. 물론 니네베가 도로 악한 길로 돌아서면 하느님께서는 경고하신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훗날에는 실제로 그렇게 된다(스바 2,13-15 참조).

 

이때 요나가 선포한 신탁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달한 것이었다(요나 3,5.8-9 참조). 다시 말해, ‘야훼’가 아니라 일반명사 ‘하느님’이다. 따라서 니네베인들이 자기들의 신인 아슈르나 이쉬타르를 향해 회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는 이민족의 한계를 헤아리시어 중립적인 이름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요나는 자신이 선포한 재앙이 실현되지 않자 몹시 언짢아서, 차라리 자기를 죽이시라고 불평한다. 신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거짓 예언자가 될 판에, 이스라엘이 아닌 이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도 배가 아팠다(신명 18,22: “그러나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였는데도 그 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가 제멋대로 말한 것이므로, 너희는 그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참조). 그래서 혹시 늦게라도 재앙이 내리지 않을까 하여, 성읍 동쪽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요나 4,5).

 

그때 주님께서 아주까리 한 그루를 자라게 하시니, 요나는 그늘이 생겨 기분이 좋았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신다고 흐뭇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딱 하루가 지나자, 벌레가 와서 나무를 몽땅 먹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동풍까지 겹쳐, 요나는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샛바람이라고도 하는 동풍은 성경에서 주님의 응징 수단으로 자주 나온다(예레 18,17; 에제 17,10 등 참조).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동풍의 고통을 알지만, 광야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라 새싹을 말라 죽게 한다(호세 13,15 참조). 광야의 모래도 쓸어오므로, 시야까지 뿌옇게 흐리게 한다.

 

작열하는 태양에 아주까리(왼쪽 사진) 그늘은 사라졌고, 모래바람까지 부니 요나는 숨쉬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예언자는 또 죽겠다고 화를 낸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하루 자란 아주까리가 그렇게 아까운데, 오래 살아온 니네베 주민들은 얼마나 아깝겠느냐며 자비심 없는 요나를 깨우치신다.

 

 

요나의 교훈

 

요나가 주님께 불순종한 뒤 바다에 빠졌을 때 자기를 죽은 목숨으로 여겼듯, 니네베도 악행이 쌓여 재앙을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요나는 자신은 용서를 받고도 니네베가 용서받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인다. 자신은 주님의 자비를 입어도, 이민족이 그 자비를 누리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나는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격이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자. 요나는 주님의 명령에 바로 순종하지 않았지만, 니네베인들은 신탁을 듣자마자 회개했으니 요나보다 나았다. 그러니 요나는 니네베가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판단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다!

 

곧, 이 이야기는 우리 눈에 아무리 자격이 없어 보이는 이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래서 타인을 대하는 너그러움을 배우게 한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주님의 명대로 신탁을 선포했는데도 그 예언이 곧이곧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 예언자나 백성이나 그것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돕는 예도 된다.

 

요나의 이야기는 주님의 자비와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만민에게 뻗치게 되리라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었다가 주님의 백성으로 접붙여진 우리에게(로마 11,16-24 참조) 이 이야기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0월호, 글 · 사진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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