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0)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마르 9,35)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따지는 제자들 -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사건, 그리고 그 의미를 전해주는 당사자이다. 그림은 기를란다요 작 ‘첫 제자들을 부르심’, 1481~1482년,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가톨릭굿뉴스 갤러리 제공. 예수님의 활동과 여정에 줄곧 함께했던 이들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제자들은 예수님 드라마의 증인들이기도 합니다. 신학에서 이들은 ‘목격 증인’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적지 않게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난 제자들이지만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이후에 공관 복음은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을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전하지만 마르코와 루카는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제자들로서 분명 훌륭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한편으로 제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내용입니다. 모든 이의 종이 돼야 한다는 말씀은 의미상으로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워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종 또는 섬기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신 이런 모습은 바로 섬기는 사람으로서 겸손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또 다른 제자들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마태오 복음은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9,37). 이들의 청원 역시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논쟁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 역시 섬기기 위해 왔음을 강조하십니다. 누가 크고, 높은 사람인지 따지고자 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한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가 전하는 제자들의 논쟁은 단지 제자들의 문제가 아닌, 지금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공동체를 이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놓여 있는 자리입니다. 복음서들은 공통으로 제자들이 논쟁을 벌인 이야기를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이후에 전합니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이후에는 누가 큰 사람인지 따졌던 논쟁을, 그리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이후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청으로부터 시작된 가르침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아섰던 모습과도 부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미리 알려줬지만, 제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서는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 이후에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수님께 벌어질 일과는 전혀 다르게 성공과 영광만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겪으면서 변하게 됩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통해서도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목격 증인이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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