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1)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 9,53)
이방인들에게도 두 팔 벌리신 예수님 -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네 복음서 중 루카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준 사마리아인 이야기 등 사마리아인에 대한 긍정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림은 반 고흐 작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89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가톨릭 굿뉴스 제공.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루카 복음은 이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사마리아 마을로 가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반목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배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됩니다. 북쪽 지역은 북이스라엘로, 남쪽은 남유다로 서로 다른 왕국을 세웁니다. 이스라엘의 분열된 왕국은 모두 시간 차이를 두긴 하지만 비극의 역사로 끝납니다. 기원전 722년경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아시리아는 사마리아에 살던 이들을 이주시키며(2열왕 17,6) 정책적으로 그 땅에 이방인들이 살도록 합니다(2열왕 17,24). 이러한 과정에서 사마리아는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고 또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정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남유다 역시 바빌론의 침략으로 성전을 잃고 유배를 경험하게 됩니다(기원전 587년경). 비슷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졌던 이들이지만 유배 이후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기원전 450년경 사마리아는 자신들의 땅 그리짐 산에 성소를 세우게 됩니다. 이런 사건 이후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유다인들은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었지만 전쟁과 침략을 거치면서 서로 다른 민족처럼 반목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지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됐다고 처음 전하는 것은 사도행전 8장 4-2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했다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는 특별해 보입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여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만이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유독 루카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나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만이 유일하게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루카 17,11-19)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고유한 이야기입니다. 루카의 고유한 이야기들은 다른 복음서와 구분되는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가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였던 루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복음서의 초점이 이방인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 유다인들이 아닌 모든 이들을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루카 4,16-30 참조).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고자 했다는 루카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납니다. 비록 그들이 아직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선포하길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선포는 혈통을 중시했던 유다인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새로운 기쁜 소식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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