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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히브리어 산책: 다바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3 조회수11,070 추천수1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다바르


말씀, 사건을 뜻하는 ‘다바르’… 실제 존재하는 것 의미

 

 

‘다바르’의 대표적인 뜻은 ‘말씀’이다.

 

다바르. 히브리어 다바르는 명사로만 1400번 이상 나오는 기초 단어다. 달레트(d) 안에 하늘색으로 찍은 점은(약한 다게쉬)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할 때만 사용된다. 이런 경우에 d를 겹쳐 쓰지 않는다.

 

 

다양한 말씀

 

하느님의 말씀도 다바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씀도 다바르다. 하느님께 아름다운 노래를 올리는 시편 저자의 바른 마음은 “아름다운 다바르”(시편 45,2)로 넘쳐 흐른다.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주신 것도 다바르다.(예레 1,1) 일찍이 다윗 임금은 다바르를 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1열왕 2,4)

 

다바르는 다양하게 옮기는 말이다. 이집트나 페르시아 임금 같은 최고 권력자의 말은 “분부”(탈출 1,17; 에스 1,12)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다음 임금이 누가 되어야 옳은지를 놓고 신하들과 사제가 교환하는 말은 “의논”(1열왕 1,7)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다양한 사건

 

그런데 다바르는 특정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윗 임금의 대표적인 흠이라면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아내 밧 세바를 취한 사건이다. 이를 “우리야 사건”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우리야의 다바르’(1열왕 15,5)다.

 

우리야 사건(1열왕 15,5). 다윗 임금의 대표적인 흠은 ‘우리야 사건’이다. ‘우리야’가 ‘다바르’를 꾸며줄 때, 다바르의 모음은 이렇게 바뀐다(연계형). 달레트(d)의 푸른 점은 앞 그림에서 설명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기근이 들어 이집트에 들어가서 그랬고(창세 12,10-20), 다른 한 번은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에게 그랬다(창세 20장). 성경에는 두 번 모두 이 ‘사건’을 다바르로 표현한다. 하느님은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다바르(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세 12,17) 그라르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그대는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다바르(일)를 저질렀소?”(창세 20,10)라고 항변했다.

 

미디안의 사제이자 모세의 장인인 이트로는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일어나고 광야로 떠난 모세를 찾아온다. 그는 울부짖는 백성을 구하신 위대한 일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는 “그 다바르(일)에서도 이제 나는 주님께서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았네”(탈출 18,11)라고 고백한다. 이렇듯 다바르는 입술에만 머무르는 가벼운 말을 뜻하지 않는다. 독일어의 ‘이야기’(Geschichte)는 ‘역사’(Geschichte)란 뜻도 있다. 히브리어 다바르도 실제 일어난 역사를 뜻한다.

 

모든 일(판관 18,10). 히브리어 콜(kol)은 영어 all처럼 ‘모든’이란 뜻이다. 히브리어 모음 카메츠는 대개 모음 ?로(빨간색) 소리 나지만 이처럼 o가(분홍색) 되기도 한다(악센트 없는 폐음절). 복잡한 문법 규칙보다, 콜(kol)은 자주 나오는 낱말이므로 그냥 이렇게 콜(all)로 외워두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어떤 일이라도 다바르

 

그래서 특정한 역사뿐 아니라 그저 어떤 일이라도 다바르가 된다. 아모스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다바르(일)도 하지 않으신다”(아모 3,7)고 말했다.

 

이스라엘에 판관이 다스리던 시절, 단 지파는 땅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용감한 사람 다섯을 뽑아 땅을 알아보게 하였는데(판관 18,2), 다섯 명의 정찰대는 좋은 땅을 보고 와서 “세상에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판관 18,10)라고 보고하였다. 이 말은 이렇게 직역할 수 있다. “그 땅에 있는 어떤 다바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이때 다바르는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말은 모든 것이다

 

하느님은 다바르로 세상을 만드셨다. 다바르는 말이자 사건이자 사물이다.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인식된다. 꽃이라는 말이 되어야 비로소 꽃이 되지 않는가(김춘수). 그러므로 말씀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 현대 철학의 통찰이 히브리어의 다바르에 들어 있다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 말이 모든 존재의 집이라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무슨 의미일까? 모든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실현된 사건이란 의미가 아닐까? 육화의 신비가 이미 다바르에 있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13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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