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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히브리어 산책: 다섯째, 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2 조회수6,594 추천수1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다섯째, 헤


하늘 향해 기도하는 모습 형상화, 땅에 엎드린 겸손한 형태로 변화

 

 

히브리어의 다섯째 글자는 헤다. 헤는 기도의 문자다.

 

- (그림1) 고대 이집트어의 헤. 왼쪽 붉은색이 헤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기도하는 사람의 머리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글자는 점차 단순화되어 한문의 산(山)처럼 발전한다.

 

 

하늘에 올리는 기도

 

고대 이집트에서 출토된 헤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자(그림1). 머리를 들고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을 형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 다리를 보니 아마도 앉은 것 같다. 이 원초적 글자에서 고대 셈족의 ‘기도 양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도란 본래 일상의 활동을 잠시 멈추고 마음을 모아 하늘을 향해 올리는 거룩한 행위였을 것이다.

 

(그림2) 헤의 발전. 수평을 지향하는 왼쪽 글자(푸른색)는 고대 셈어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형태다. 우가릿어 쐐기문자(초록색)도 수평의 모습이다. 일부는 아래를 향하는데(회색) 현대 히브리어(붉은색)의 헤는 완전히 땅을 보고 있다. 그리스어의 엡실론(맨 오른쪽)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뿐이다.

 

 

수평과 겸손의 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글자는 하늘이 아니라 왼쪽을 향하게 되었다(그림2). 사실 팔과 머리를 하늘로 향한 글자는 매우 고대의 형태로서 퍽 드물게 나타나고, 대부분의 고대 셈어 계통에서 헤는 왼쪽을 향하고 있다. 우가릿어 쐐기문자에서도 수평의 모습이 확연하다(그림2).

 

왜 수직의 기도가 수평의 행위가 되었을까? 필자는 이렇게 추측해 보았다. 본디 고대에는 하늘에 직접 기도했기에 머리가 하늘을 향했지만, 신전을 세운 다음에는 신전의 신상이나 제단을 향해 기도했기 때문에 수평을 향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글자의 변화에서 우리는 ‘기도 양식의 발전사’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부 글자는 아예 바닥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제단 앞에 엎드려 땅에 머리를 조아린 듯한 모습이다. 현대 히브리어 글자는 완전히 땅바닥을 향하고 있다(그림2). 헤의 변천사 가운데 현대 히브리어 문자가 가장 겸손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자의 이름이 ‘헤’인 것은 기도를 시작하는 소리나 기도 중에 읊조리는 소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헤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스어 엡실론의 형태를 보면 왼쪽을 향하던 셈어 계통의 헤를 오른쪽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셈어의 헤가 땅바닥을 향하기 전에, 곧 온전한 수평의 형태였을 때 그리스어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결국 오른쪽을 향한 수평의 형태는 라틴어를 거쳐 오늘날 서유럽의 알파벳에서 E가 되었다. E의 라틴어 이름 ‘에’에서 기도 중에 읊조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향하고 투신하는 기도

 

위를 향했든 옆을 향했든 아래를 향했든, 고대근동의 기도를 형상화한 헤는 모두 ‘지향점’이 있다. 기도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닌 어떤 다른 존재를 향해서 몸과 마음을 겸손되이 개방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향해 내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거룩한 행위가 기도다. 그러므로 지향이 없는 기도나 스스로를 내어주지 않는 기도란 없다.

 

- (그림3) 힐렐. ‘찬양하다’는 뜻의 대표적인 동사다(피엘형). 가운데 검은 점(다게쉬)은 두 번 썼음을 표시하므로 l을 겹쳐 써야 한다.

 

 

찬미하는 할렐루야

 

헤의 원래 의미를 잘 살린 히브리어 단어는 단연 힐렐이다. 힐렐은 본디 ‘칭찬하다’의 의미지만,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하느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노래인 시편은 힐렐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대개 우리말로 ‘찬양하다’로 옮긴다.

 

시편에는 “나는 주님을 힐렐하리라”(“찬양하리라” 시편 146,2 등) 또는 “주님을 힐렐하여라”(“찬양하여라” 148,1 등) 등의 표현이 무척 자주 등장한다. 시편의 저자는 하느님을 힐렐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고백하고(시편 84,5)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힐렐합니다”(“찬양합니다” 시편 145,2)고 다짐한다. 결국 시편 저자는 모든 민족과 겨레가 하느님을 힐렐하는 날을 꿈꾸고(시편 117,1), 시편의 마지막 편은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힐렐하여라”(시편 150,6)고 노래한다. 특히 자선주일을 맞아 “억눌린 이가 수치를 느끼며 돌아가지 말게 하시고 가련한 이와 불쌍한 이가 당신 이름을 힐렐하게 하소서”(시편 74,21)라는 시편의 한 구절이 가슴에 남는다.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11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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