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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과 응답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5-17 조회수8,871 추천수0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과 응답

 

 

소문을 들으니 딸을 살릴 청년이 바닷가에

 

마르코 복음은 멋진 문학적 기교가 있다. 그것은 ‘샌드위치 기법’인데 샌드위치처럼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된 구조다. 흔히 이 삽입된 이야기에 핵심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 이야기(5,21-43)는 바로 이 샌드위치 기법에 속하는 이야기로서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야이로 이야기이고, 가운데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먼저 애지중지 키운 어린 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야이로는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그는 회당장이다. 유다 사회에서 회당장은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회당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바빌론으로 유배 간 유다 민족에게 당시 민족의 정체성 회복과 보존이 가장 중요했기에 회당을 지어 그들의 종교 생활을 이어 갔다고 본다.

 

그런 야이로가 들은 소문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라는 나자렛 청년이 연일 사람들을 고쳐 주고 또 새로운 가르침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병든 사람들을 살려 줄 뿐만 아니라 게라사 지방에서는 도저히 나을 수 없는 광인도 고쳐 주었으며, 근방에 있던 돼지 떼 이천 마리쯤이 그 일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까지 하였다. 수소문해 보니 다행히 바닷가로 다시 왔다는 것이다.

 

죽어 가는 어린 딸에게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야이로는 그 청년을 만나 부탁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만일 그가 손을 얹어 준다면 자신의 딸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앞뒤 체면을 볼 것도 없이 사람들을 밀치고 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 앞에 엎드려 말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선뜻 함께 가 주시겠다고 하셨고, 절망했던 야이로는 힘이 생겨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연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놀라운 일에 사람들은 각자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야이로의 집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

 

 

절망과 희망 사이의 숨 가쁜 바닷길

 

야이로의 바쁜 걸음이 시간의 급박성을 드러낼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셨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생겼다. 왜냐고 묻기도 전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초를 다투어 가도 아이의 생명이 위태한데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고 있다니.

 

그리고 제자들의 반문도 즉각 들려왔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31절)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많은 군중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갑자기 어떤 여인이 나와 그분 앞에 엎드려 몸을 떨며 말하기를 자신이 12년 동안이나 하혈을 했는데 방금 나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본즉슨 그동안 여러 의사에게 보였지만 재산만 탕진한 채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했다.

 

사실 하혈하는 여인이 만진 것은 예수님의 겉옷의 아무 곳이 아니고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민수 15,38-40 참조)을 살짝 건드린 것이다. 1세기 랍비 문헌에는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온전한 사람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겉옷에 달린 술이 그 사람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영적인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성경 시대 유다인에게는 그 옷단 술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이 집약된 곳이었다( 「열린다 성경」 참조).

 

당시 옷자락 술에 대한 신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들어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 청했고, 손을 댄 사람마다 나았다고 한다(마르 6,56 참조).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으로 사람들이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제는 고립이었다

 

이 여인의 병이 무엇일지 유추해 볼 때, 비규칙적인 심한 월경 또는 만성적 자궁질병일 수 있다. 여성이 피를 흘리는 것이 레위기 15장에 근거하여 제의적 부정함과 연관된 유다교에서 이런 질병을 지닌 여성들은 제의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탈무드」에서 하혈하는 것에 대한 민간요법을 보면, 타조 알을 태운 재를 헝겊에 싸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암나귀 배설물에서 꺼낸 보리알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 당연히 낫지 않을 민간요법이다.

 

율법에 따르면, 다달이 하는 월경 때에도 여성들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하고, 그 여인이 만지는 물건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12년 동안이나 이런 제의적 금기 속에서 살아온 여인은 자신의 가족, 곧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이들과 접촉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집 안에 고립되어 있었고, 외부로부터도 당연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 남편이나 자녀들, 그리도 이웃과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었고 의사들에게 보이느라 재산까지 거의 탕진했으니, 가족 볼 면목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정한 사람이니 철저히 혼자였을 것이고, 병보다 오히려 외로움으로 더 고통받았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이 없는지 고립되어 있던 그 여인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분은 어떤 병이든지 거의 낫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 나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길 위에 섰을 것이다. 마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포니족의 습격으로 수족과 함께 살았던 백인 여성 ‘주먹 쥐고 일어서’처럼 말이다.

 

 

그분의 옷자락 끈으로 얻은 평안

 

여성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이야기가 주는 놀라움은 12년 동안이나 하혈한 여성이 살려고 집을 뛰쳐나와 길 위에 선 사실이다. 아니 그보다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 같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건강한 일반 여성 가운데도 월경 때문에 빈혈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12년 동안의 하혈은 분명 빈혈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수 있으며 심한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혈하는 여인의 생명에 대한 이토록 강한 열망과 예수님을 통한 치유의 믿음은 가히 그 복잡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강했는지 모른다. 그 순간 예수님의 영원한 신성은 치유의 빛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도망갈 시간도 없이 군중 앞에 노출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딸’이라고 부른다. 12년을 하혈한 상태로 보아 어린 나이는 아닐 텐데 말이다. 그 당시 랍비 문헌에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옷단 술의 자녀들은 만져도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그러셨을 것이다. ‘평안히 가라.’는 그분의 말씀은 12년간의 부정한 존재적 멸시와 긴 고립으로 산 고통을 한 번에 치유해주시는 위로였을 것이다.

 

 

끼어든 여자, 야이로의 믿음의 거울 되다

 

가끔 현실이 더 영화 같을 때가 있다. 아마 이 순간인 것 같다. 동시다발적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그녀는 병이 나았으며 동시에 사람들이 와서 아이가 죽었다고 야이로에게 알려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까지도 그녀와 말씀하고 계셔서 야이로는 다리가 풀려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야이로는 아마 속으로 이렇게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아 저 여자 때문에! 저런 정결하지 못한 여자가 내 어린 딸이 살 시간을 빼앗아 가다니!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말하는 동안에도 야이로를 계속 신경 쓰고 계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하시면서 야이로를 진정시키셨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다는데 어떻게 믿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걸음을 내디디시며 걸어가셨다.

 

집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그 길! 야이로는 군중의 틈에서 울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울음을 삼킨 그에게 좀 전에 끼어든 그 하혈하는 여자의 믿음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녀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믿어 건강을 되찾아 가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야이로를 위해 보여준 살아 있는 ‘믿음의 거울’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야이로는 치유된 그 여인에게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래 한번 믿어 보자.’고 힘을 내며 갔을 것이다.

 

피리 소리와 곡하는 소리,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 야이로는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로 고요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는 말씀으로 절망과 희망 사이에 선 야이로에게 딸의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

 

짐작하건대, 회당장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그 길은 너무나 길고 멀리 느껴진 길일 것이다. 또한 그들 모두에게 ‘절망과 희망 사이’의 숨가쁜 길이었겠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걸어왔고, 그 믿음은 응답을 받았다.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도 드러나지만 오히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과 보살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정결과 부정의 율법이 준 족쇄를 과감히 풀어 열두 살의 어린 여자아이도, 12년간 하혈로 고생한 중년의 여인에게도 그들의 생명과 삶의 온전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살다 보면 우리도 야이로와 하혈하는 여인처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을 맞이한다. 이러한 인생의 굴곡의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섬세하게 우리를 돌봐 주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채는 것은 더 큰 은총이 아닐까.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 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5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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