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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16: 갈릴래아 전도와 희년 선포(루카 4,14-30)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04 조회수5,427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16) 갈릴래아 전도와 희년 선포(4,14-30)


선입견에 사로잡힌 군중, 예수를 벼랑 끝에 몰다

 

 

- 나자렛의 절벽산 비탈. 나자렛 시내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절벽산은 나자렛 주민들이 격노해서 예수님을 끌고 가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산으로 전해진다. 이 절벽산에서 시작해서 비탈을 타고 내려가 갈릴래아 호수 북단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길’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제부터 예수님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살펴봅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고, 그곳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칭송을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4,14-15) 학자들은 이 성경 대목이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을 먼저 요약하고 있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세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힘, 갈릴래아, 회당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활동이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인 나자렛을 포함해 갈릴래아 호수 일대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예수님 활동의 중심 무대입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구약 시대 때부터 이집트에서 근동으로 가는 육상 통로의 요충지였습니다. 당연히 이민족의 침략과 왕래가 잦았고 그래서 “이민족의 갈릴래아”(마태 4,16; 이사 8,23)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변방 지역, 이민족의 갈릴래아가 예수님 활동의 출발지이자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은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갔을 때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길이 없던 유다인들이 성전 대신으로 사용하고자 마련했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예배하는 관습이 이어지면서 곳곳에 회당이 생겼습니다. 회당은 안식일에는 예배 장소로 평일에는 공공집회 장소와 재판정으로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겠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신 일화를 공생활의 앞머리에 내놓습니다.(4,16-30) 이 일화는 예수님의 말씀 → 청중의 반응(긍정에서 부정) → 예수님의 대응 → 격분한 청중이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차례로 살펴봅시다.

 

나자렛 주님 탄생 예고 대성당 인근에 있는 나자렛 회당터에 세워진 회당 경당.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어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 찾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이 대목은 이사야 예언서 61장 1-2절에서 일부 구절(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주어)을 빼고 58장 6절(억압받는 이를 자유롭게 내보내며)을 덧붙인 것입니다. 마지막의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레위기 25장 8-13절에 나오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라는 구절은 희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를 성별할 때에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1열왕 19,16 참조) 그렇다면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예언자로서 직접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층 더 놀랍게도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는 분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또한 희년에서 선포되는 내용을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좋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지요.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돌변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 이 말투에는 ‘우리가 너의 출신을 아는데 네가 잘나 봤자 얼마나 잘났다고 그러나?’ 하는 업신여김 혹은 비아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을 반박하십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격언을 인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일화를 들면서 당신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의 오만과 불손을 질타하십니다.(4,24-28) 

 

이 말씀에 사람들은 오히려 격분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4,28-29) 이 위기 상황에서 루카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4,30)라는 표현으로 일화를 마무리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한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희년을 몸소 실현하시리라는 것을 예시합니다. 또 희년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가르침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리라는 것을 예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 아닌가?’ 하고 얕잡아봤듯이, 우리 또한 어떤 사람을 좋게 이야기하다가도 그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사람의 훌륭한 점, 장점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나의 선입관, 고정관념에 집착한 나머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그 사람에게 모욕을 준 적은 없었는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 끝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고 루카는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하십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고 그것을 확신하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유유히 자리를 뜨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하느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시련이나 어려움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둡시다 - 희년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그다음 해 곧 50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 이 희년은 거룩한 해(성년, 聖年)로서, 안식년 때와 마찬가지로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나는 소출을 거둬서도 안 됩니다. 땅만이 아니라 가축도 쉬게 해야 합니다. 빚을 탕감해 주고, 종으로 팔린 사람을 다시 풀어줘 자기 집에 가게 하고, 땅은 소유주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해입니다.(레위 25,8-15) 

 

이 희년 제도에는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고 좋았다 하신 그 상태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원상회복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불순종과 죄로 하느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새롭게 회복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희년을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여 제도화한 것이 성년(聖年)입니다. 교회는 성년 때 일정한 조건을 이행하면 받아야 하는 모든 잠벌(暫罰)을 사해 주는 전대사를 발표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을 다시 원상으로 되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4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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