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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거룩한 독서: 평화의 다른 이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21 조회수5,542 추천수1

[이달의 거룩한 독서] 평화의 다른 이름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읽기 Lectio - 본문을 자세히 읽고 살핀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인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다. 두려움에 (마음의)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19절) 제자들에게 그분은 먼저 평화를 주시며 부활을 체험케 하시고 성령을 통한 ‘용서의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러면 도대체 그분이 주시는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의 다른 이름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 첫째, 평화는 곧 ‘예수님 자신’이다. 그런데 그분은 오상을 지니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못과 창에 찔린 상처는 평화를 위해 치른 희생이었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부활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둘째, 평화는 ‘기쁨’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그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기뻤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모두 치유할 만큼 큰 기쁨이었다. 그 기쁨에는 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셋째, 평화란 곧 ‘성령’이다(22절).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기 위해 그분은 숨을 불어 넣어 주셨다.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맡겨 드렸듯이 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프네우마)을 전해 주셨다. 이는 태초에 하느님이 아담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신 것(창세 2장)과 같은 ‘새로운 창조’ 행위이다. 인간이 비록 흙(아다마)으로 빚어졌지만 하느님의 숨(루아흐)으로 살아 있는 존재(네페쉬 하야)가 되었듯, 제자들 역시 한계를 지녔지만 성령으로 새 삶을 사는 존재가 된다.

 

넷째, 평화란 성령이 하시는 일, 바로 ‘용서’다(23절). 하느님의 권한인 용서가 제자들의 사명이 되었다. 하지만 용서는 성령의 몫이다. 용서하겠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용서’를 ‘내가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용서의 몫을 성령께 되돌릴 때에만 진정한 용서의 기쁨,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또한, 평화란 ‘의심을 버리고 믿는 것’이며, 그를 통해 누리는 ‘행복’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29절)고 하셨듯, 부활에 대한 믿음은 참 행복을 가져다준다.

 

결국 예수님, 평화, 부활, 기쁨, 성령, 용서, 믿음, 행복은 다 같은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바로 전체로서의 하나! 이 중 하나만 빠져도 온전한 의미의 평화,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이다(요한 14,27-31 참조).

 

 

묵상하기 Meditatio - 본문의 의미를 우리 삶에서 바라본다

 

상처를 간직한 평화, 아픔이 승화된 기쁨, 성령의 궁전인 흠 많은 제자! 무릉도원과 같은 평화를 바라는 우리에게 복음은 상처와 결핍을 이야기한다. 부활과 십자가를 떼어 놓을 수 없듯, 사랑으로 극복된 상처와 결핍은 평화의 씨앗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느 곳 하나 평화롭지 않다. 대립과 차별, 폭력과 거짓, 선동과 불의, 신음하는 자연…. 심지어 믿는 이의 공동체도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 사는 나 자신도 평화에 목말라 신음한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평화는 결핍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평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 새 무덤이 있었다”(19,41). 수난의 자리요, 무덤의 자리인 결핍의 장소가 바로 ‘부활의 자리’였음을 되새겨 본다. 넘어진 사람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어두운 곳이 바로 부활의 자리가 되고, 그곳에서 이룩한 평화가 진정한 평화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기도하기 Oratio - 묵상한 것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말씀을 건넨다

 

주님, 당신 없이 평화란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나이다. 저희와 이 시대가 참 평화를 주러 오시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고 평화를 갈구하게 하소서. 저희의 어두움조차 평화를 이루는 씨앗이 되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되새기고 실천하기 Ruminatio et Actio - 말씀을 되새기며 삶과 연결시킨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의 다른 이름들은 무엇인지 되새겨 봅시다.

 

2. 결핍을 극복한 평화는 용서로 표현됩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 허광철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현재 4대리구 사목국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7년 6월호, 허광철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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