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의로움 한 친구를 만났다. 술을 몇 잔 마시더니 교회 내 복지시설의 잘못에 대해 거듭 힐난한다. 부조리한 행태, 인권 유린, 잘못된 관행들이라며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때로는 공감으로, 때로는 반감으로 함께했다. “교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악의 모습을 교회 안에서 보다니!”, “그래, 교회가 그래서도 안 되지만 네 생각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아. 다른 이유와 상황이 있을 수 있잖아.” 친구는 당황과 실망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친구도 팔이 안으로 굽는구나.’ 싶은 모양이었다. 그랬다. 난 적어도 우리 교회의 부족함을 인정해도 악의 모습을 본다는 말에는 동의를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불의를 무 토막내듯 딱 잘라 말하는 그 친구의 호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몇 잔 더 마시고 그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는 차를 몰고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아직 씁쓸함으로 남아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게 있다.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저마다 삶의 기준이 있을 테고, 다들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기 위해 얼마간의 노력을 하는 게 사람됨을 유지시키는 것이라 여긴다. 다만 무엇이 의로운지 묻는다면 그 대답으로 여러 이견들이 존재한다. 어떤 것이든 세상이 말하는 의로움은 ‘지켜야 할 무엇’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데서 얼마간의 실루엣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의로움은 무엇일까? 신앙인에게 의로움은 지켜야 할 숙제라기보다는 갈구해야 할 기쁨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 기쁨은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충실성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의 약속을 하 셨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 백성을 위한 “땅과 후손”은 손수 챙기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도 그랬고(판관 5,11;1 사무 12,7-15),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갔을 때도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다.(이사 41,10)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일편단심을 성경은 ‘의로움’이라 말한다. 굳이 고쳐 말하자면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만나야 할 대상을 껴안는 게 성경의 의로움이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충실하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의로우셨다.(1요한 1,9) 이스라엘은 의로움을 살기 위해 율법을 선택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뒤, 켜켜이 쌓이는 역사의 장면들 속에 이스라엘은 무엇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맞갖는 것인지 고민했고, 그 결과 수많은 율법으로 재생산되었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7년)는 율법에 소홀했던 이스라엘의 자기 반성을 위한 시간이었고, 반성은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한 율법의 준수를 부추기게 되었다. 사제 계급을 중심으로 모세오경이 편집되고 선포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의로움을 율법을 지켜내는 정도에 따라 가늠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과 그분 백성 간의 충실성을 위해 율법의 준수는 정언명령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을 갈망하며 그분의 뜻에 맞갖는 삶이 기쁨이어야 할텐데, 율법은 조금씩 이스라엘의 삶을 옥죄는 심판과 단죄의 도구가 되어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요약한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율법의 역할이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그친다면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 공동체 구성원들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몸이 조금 아파도,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도, 행동거지가 여느 사람들에 비해 특출나도 죄인 취급 받는 건 한순간이 되어 버린다.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그리고 백성들 간에 누려야 할 연대와 친교의 기쁨인 의로움은 편협한 율법주의에 의해 뒤집혀진다. 율법에만 의지하고 율법이 지향하는 궁극의 존재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사도 바오로는 ‘저주받은 것’이라 힐난한 것이다. 참된 의로움은 지켜야 할 율법을 뛰어 넘는 믿음 안에 가능한 것이다. 믿음이든 신뢰든 상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믿을 누군가가 있어야 의로움은 이루어진다. 손뼉도 마주칠 두 손바닥을 필요로 하듯, 의로움도 율법을 준수하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는 자기만의 수덕생활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유하고 그분의 뜻이 제 본디 삶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내적 친교를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율법의 실천은 이 친교를 사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결과론적 열매다. 우리가 의로움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너무 의롭게 살려는 과도한 결기 때문이 아닌지 자주 반성해 본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늘 되묻지만 그 해답 안에 슬그머니 쑤셔 넣는 게 제 자존심인 경우를 자주 체험한다. 잘 사는 건 정확히 제 자존과 이익에 맞닿아 있어야 했다. 제 꼴이 망가지고 볼품없이 되는 걸 잘 산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더 잘 살기 위해 잘 못 산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바쁘고, 잘 사는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 때문에 지금의 제 모습을 찬찬히 살펴볼 겨를조차 잃어버리는 게 우리를 의로움에서 멀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33) 예수님은 당신을 버림으로써 의로움을 이루셨다. 인간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 신뢰의 끝을 어리석고 비천한 십자가 죽음으로 마치셨다.(로마 8,3) 예수님의 죽음은 그 흔한 희생이나 대속의 개념으로 정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여 십자가를 지신 건 의롭기 위해 피해야 할 죄까지도 껴안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까지도 감내하는 무한한 수용이고 전적인 개방이었다. 예수님 그분이 지향한 가치는 특별한 한둘의 구원이 아니라 만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6-17) 만물이 옳고 그른지, 만물의 상태와 형편에 따라 제각각일 테고 제각각인 만큼 판단의 기준 역시 혼란스러울 테다. 누군가에게 옳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의롭다 외쳐도 또 누군가는 불의라며 쌍심지를 켜는 게 세상이고 만물의 교차방식이다. 예수께서 만물의 시작이자 끝이 되시는 것은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들이는 십자가의 삶 덕택이다. 누구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서로가 용서하고 다독이고 쳐다볼 수 있는 자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의로움을 완성시키셨다. 그런 예수님과 더불어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다. 갈라디아서는 그 길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이 구절을 되뇌일 때마다 사도 바오로의 예수 사랑에 대해 묵상한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얼마나 갈망했으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싶었을까 싶다. 사랑은 개인적 노력 여하에 따라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무모한 의탁, 이를테면 끝없는 믿음을 준다는 데 얼마간의 안도감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지켜야 할 율법을 되새기고 다듬어야 할 제 육신의 모난 점을 일일이 들추어내어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건 사랑보다는 수련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 저절로 잘해주고 싶고, 저절로 마음이 가고, 또 저절로 가슴이 저릴 때가 많다. 내가 잘한다고 사랑이 영글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우리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이 그렇고, 연인의 사랑이 그러하며, 하느님의 사랑 역시 그러했고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사도 바오로는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다.(로마 1,17) 그리고 그런 믿음의 삶이 기쁜 소식, 복음이라 했다.(로마 1,16) 사랑하는 이들 안에 무모하게 의탁하며 뭐든 내어주려는 믿음 안에 의로움은 싹트고 완성된다. 따져보고 계산하면서 옳고 그름을 재단하고, 그것으로 함께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할 수 있는 세상(이사 11,1-9),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비루하고 비천한 이들까지 형제 자매로 여길 수 있는 세상, 거기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의로운 세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에 머물러야 할 자리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어찌되었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을테다. 내 눈에 원수라도 일단 믿고 사랑해 보련다. 그게 태초부터 이 세상과 함께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믿으며…. 술잔을 기울이며 결기에 차 정의로움을 한껏 쏟아내던 친구가 음주운전을 한다는 역설, 그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가지는 의로움의 자화상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의로움을 외치지만 제 삶의 부족함과 부조리를 인식하고 고백하는데 서툰 게 인간의 의로움이다. 서로 부족하기에 필요한 건 믿고 의지하고 토닥이는 것이리라. 그게 참된 의로움을 향해 또각또각 천천히 걸어가는 우리 신앙인의 의화, 바로 그 의화다. [월간빛, 2017년 7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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