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8)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루카 8,1-3)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킨 갈릴래아 여인들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실 때 열두 제자와 함께 여인들도 함께 따라다녔다. 특히 여인들 중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다. 그림은 엠마누엘 람파르도스 작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1610년, 그리스 크레타 이콘, 예루살렘, 이스라엘. 출처=굿뉴스 가톨릭갤러리. 루카는 예수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뿐 아니라 여인들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그 여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면서 그중 몇몇 여인의 이름을 밝히기도 합니다.(8,1-3)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을 도운 여인들이 누구인지 살펴봅니다. 세 여인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루카는 우선 세 여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듭니다. 막달레나라는 마리아와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8,2) 전력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여인이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8,3)였습니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여인이 이전에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숫자에서 일곱은 완전함, 충만함을 뜻한다고 할 때 마귀의 세력에 철저하게 지배당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리아에게 ‘막달레나’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리아의 출신지를 나타냅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여자들에게 출신지를 붙여서 ‘금촌댁’ ‘안성댁’ ‘목포댁’ 하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막달레나는 ‘막달라’ 여자를 가리키는데,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의 ‘미그달’이라는 동네를 일컫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서안의 대표적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호수를 끼고 북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꽤 부유한 어촌이었지만 폐허가 됐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이 본격화됐고, 기념 성당이 들어서 순례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지난 호에 살펴본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7,36-50)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따르면, 예수님 발을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드린 여인은 예수님께서 살리신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동일인입니다.(요한 11,2) 루카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두 여인의 이름도 밝힙니다.(8,3) 요안나는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시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을 지닌 요한의 여성형입니다.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페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영주의 집사라면 상당한 권세와 재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산나는 ‘백합’이라는 뜻인데, 이름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루카의 기록대로라면, 막달레나라는 마리아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요안나와 수산나 모두 악령 또는 질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여인들인데, 요안나와 수산나가 어떤 질병 혹은 악령에 사로잡혔다가 나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루카는 이들 세 여인 외에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8,3)고 전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일행에게 시중을 들” 정도로 예수님을 따른 “다른 여자들”은 누구일까요? 네 복음서를 통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여자들” 루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사에서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실 때에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23,55)을 언급하면서 그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아갔다고 이야기합니다.(24,1) 그리고 그 이름을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또 그들과 함께 다른 여인들도 있었다고 전하지요.(24,10)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고 전합니다.(마태 27, 55-56)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묻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합니다.(마태 27,61) 두 여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의 발현을 보았다(마태 28,1-7)는 맥락으로 볼 때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동일인이 분명해 보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여인들로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를 거명합니다.(마르 15,40-41)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기록합니다.(마르 16,1-2)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고 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 때에 빈 무덤을 본 여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만 언급합니다.(요한 20,1) 언급되는 인물 중 루카복음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태오복음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마르코복음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일 인물이 분명합니다. 여기의 야고보 혹은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마르 6,6; 갈라 1,19)를 가리킵니다. ‘작은 야고보’라고 표현한 것은 제베대오의 아들 중 하나이자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큰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공관 복음)에서 모두 나옵니다.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님의 사촌으로 예수님과 항렬이 같다면, 야고보와 요셉(혹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모와 같은 항렬입니다. 사촌, 육촌에 관계없이 같은 항렬을 형제자매라고 표현하는 당시의 언어(아람어) 관습대로라면 이모, 고모, 숙모 또한 별 차이 없이 혼용하고 있다고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공관복음에서 나란히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복음의 예수님 이모가 같은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마르코복음에는 없고, 살로메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살로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성녀 살로메로 공경해 왔습니다. 살로메 성녀의 축일은 10월 22일입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되면서 교회 공식 전례력에서는 10월 22일을 살로메 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살로메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언급되지 않고 요안나가 언급됩니다만, 요안나는 헤로데의 집사의 아내로 신원이 확실하기에 살로메나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혼동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클로파스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의 동기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님께 숙모가 되는 셈이지요. 요한복음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와 숙모까지 나오는 셈입니다. 아람어의 언어 습관 때문에 이모나 숙모가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가설일 따름입니다. 여인들 중 ‘확실한’ 네 사람 결론적으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을 들고 예수님의 죽음까지 지켜본 여인들 가운데 확실하거나 신빙성이 높은 이름을 들자면 ①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 막달레나 ② 예수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예수님의 이모 또는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동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③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 ④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를 들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 시대에 여자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부속물, 재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의 재산을 털어가며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요? - 게다가 이 여인들은 잠시 돕다가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당해 무덤에 묻힐 때까지 자기들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마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이 여인들은 충실하게 자리를 지켰고 마침내 예수님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얼마나 충실하려고 노력하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27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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