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구원(생명) “신부님, 부탁이 있습니다.” 어르신은 벼르고 있었다는듯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성체분배 때 표정이 너무 굳어있어요. 밝은 표정으로 성체를 주셨으면 합니다.” 어르신은 스스로 ‘빠샤 할아버지’로 불리는 걸 좋아하셨다. 알프스 자락에 산장을 가지고 계셨던 어르신은 손주들이 당신을 ‘빠샤 할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프랑스 말로 할아버지를 ‘빠빠’, 산장을 ‘샬레’라 한다. 앞글자를 따서 손주들이 ‘빠샤’라고 할아버지 애칭을 붙인 모양이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시면서 어찌 표정이 그리 굳어있습니까?” 그후로는 미사 때마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멀리 줄서서 예수님을 받아모시러 오시는 ‘빠샤’ 할아버지 덕에 미사 시간은 늘 미소띤 시간이었다. 그랬다. 너무 진지했다. 잘 사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설사 잘 사는 걸 안다고 해도 잘 사는데 늘 부족함을 알면서도,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진지하다 못해 굳어진 마음만을 남기며 오늘, 내일 또 살아간다. 진지하면 할수록 삶의 자세는 한 방향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성체가 귀하디 귀한 하느님의 몸이라 여긴 나머지 성체가 주는 기쁨과 희열에 대해 느껴보지 못한 채 나의 얼굴은 경직되어 간 것이다. 기쁜 얼굴은 급기야 누군가에게 슬픈 얼굴로 비친 모양이었다. 예수와 함께한다는 건, 늘 새로워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새롭다’로 번역된 ‘카이노스’는 백화점에 나열된 ‘신상품’의 새로움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지금껏 있었으나 보지 못했던 것, 여지껏 들었으나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이 ‘카이노스’다. 늘 성체를 받아모셨으나 기쁨이 배어나오지 않았던 나의 얼굴은 ‘카이노스’를 살지 못했다. 새로움을 사는 것은 실은 본질에 다가서는 삶이어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문다며 켜켜이 쌓아놓은 율법의 뭉치들은 사람을 살리기는 커녕, 단죄하고 억압하며 죽이기까지 했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 사회를 질타했다.(마태 23장) 죄인과 의인을 갈라놓고 죄인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되뇌며 죄인의 삶을 처참히 짓밟는 건 이방인도 뭇민족도 아닌 하느님 백성인 유다인들의 소행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6,15) 창조는 모든 존재의 근본을 다시 성찰케 한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닌 살아있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를 불러오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시대의 상황이나 제 삶에 대한 수덕적 검열의 문제가 아니다. 얽히고 설킨 관계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겸허한 자세를 요구한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시대에 대한 냉철한 답을 내리기 전에, 제 삶을 가꾸고 다듬어 나가기 전에, ‘나 혼자는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라는 타자에 대한 절박한 외침으로 가능하다. 관계로서의 삶을 그려내는 데 있어 요한묵시록은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의 처음과 끝부분은 ‘생명’을 자주 언급한다. 이를테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들의 말미에 생명의 나무(2,7; 22,2.14.19), 생명의 화관(2,10), 생명의 책(3,5; 20,10.15; 21,27) 등이 나타나고 요한묵시록 말미의 ‘천상 예루살렘’ 에서 그 ‘생명들’은 다시 언급된다. (20,10.15; 21,27; 22,2.14.19) 요한묵시록의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일컫는다. 그 하느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육화한 예수님이고, 어린양으로 상징된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이 함께 하는 보편적 자리로 묘사된다.(묵시 5,9) 요컨대, 생명은 세상 모든 이와 하느님이 한 자리에 모여 만드는 새로운 창조다. 서로가 예쁜 옷을 차려입고, 서로가 예의 바른, 그래서 서로가 탓할 게 없을 만큼 순결하고 정갈한 만남이 아니다. 박해에 짓밟혀 헐벗고 피폐해진 민중들이 오갈 곳 없어 백기를 들고 찾아든 것이고, 그 민중들을 가엾이 바라보는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품어주는 것이다. 시대에 대한 올곧은 비전도, 제 삶에 대한 정연한 반성도 가지지 못한 철부지들, 그들이 엎어지고 매달리는 절박함이 가득한 만남이 생명이다. 절박한 것은 세상 안에서 실패와 고통을 경험한 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사업이든, 건강이든, 그것을 이루지 못해서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에게 ‘좀 더 노력해!’, ‘걱정마! 하느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건 무자비한 폭력이 아닐까? 늘 조심스럽다. 새로운 생명, 새롭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해방으로 가능하다. ‘현실이 그렇잖아!’라고 말하기보다 현실이 왜 이럴까하고 고민하는 데서 새로운 생명과 그로 인한 설렘이 주어진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도 마찬가지다. 자비 가득하신 하느님께 무턱대고 내어맡기는 자세는, 실은 지금의 제 삶을 투명하게 내어놓고 그 삶에 대해 찬찬히 사유하는 일이다. 요한묵시록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인 생명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기를 바란다.(묵시 21,27) 윤리 도덕적 삶을 ‘잘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한 대개의 사람들은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수덕이나 수양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이를테면 각자도생, 자기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건 다름 아닌 현실 논리를 합리적, 객관적 선택이라 치부하며 살았던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신앙을 지킨다며 구태여 로마의 현실 권력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만연한 세상에서, 요한묵시록 저자는 현실이 신앙인을 힘들게 하더라도 그 현실에 기대어 신앙인의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길 요구한다.(묵시 13,4-10) 현실의 익숙함과 당연함을 근거로 화석이 된 제 삶의 껍질을 뚫고 나오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생명에로의 좁은 길이 어려울수록 머리 아픈 계산은 필수적이다. 스마트폰 속 짧막하게 스쳐 지나가는 뉴스 한토막으로 세상과 현실을 사유하는 우리의 인스턴트 성찰로는 제 자신이 어디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살펴보는 데 한계가 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태 18,8-9) ‘들어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은 ‘에이세르코마이( )’로, 상업적 수입 혹은 법정에의 출두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생명에 들어가는 건 제 수입의 많고 적음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큼 세심한 계산이 필요하다. 생명에 들어가는 건 법적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지닌 채 세밀한 전략으로 상대를 맞서는 것과 같다. 다만 경제적 수입이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법정에서의 판단이 저 혼자만의 변론에 유리할 수 없듯이, 생명을 향한 계산은 궁극엔 저 혼자만의 힘으로 될 수 없다는 겸허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생명은 사회적이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긴장과 협력, 갈등과 타협의 무한 반복 속에서 제 본질적 삶의 가치, 곧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격적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전투다. 성경은 신앙인들에게 그 전투를 예수님과 함께하길 초대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요한 3,15; 로마 5,21) 예수님 덕택에 생명을 누린다고 확언한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 입니다.”(로마 5,17) 예수님은 세상 모든 만물이 정연하게 하느님 아버지께 되돌아 가도록 당신 삶을 바치셨다.(루카 1,16; 콜로 1,15-20)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란 죽음의 방식을 통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생명은 스스로 지금의 삶을 하느님께, 모든 피조물에게 송두리째 내어 맡길 수 있는 무모한 증여, 곧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6,13) 우리의 지체는 그리 순수하지도 정갈하지도 않다. 우리의 몸뚱아리가 의로움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건 무턱대고 내어맡기는 믿음으로 가능하다.(요한 14,1) 각자도생의 길로서 선이나 정의를 지향하면서 육의 한계나 나약함을 단죄하는 방식으로는 믿음이 아니라 제 자신이 설정한, 혹은 현실 논리가 주도적으로 꾸며놓은 가치 체제에 몰입되는 편협함을 재확인할 뿐이다. 믿음은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몸뚱아리의 한계가 악하다고 저버리면 무엇을 제물로 바칠 것이며 무엇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고 무엇으로 이웃과 사회를 껴안을 것인가? 비록 나약하고 한계 지워졌어도 지금의 제 모습과 화해하고 지금의 제 모습 안에 이웃과 하느님을 초대하는 겸허함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생명은 새로운 창조로 늘 살아 꿈틀거릴 것이다.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늘 뒤틀려있어 본질을 살지 못하기에 구원은 멀리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린 구원을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있어 온 것을 누리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의 실수다. 그 실수는 놀랍게도 진정으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가려져 있다. 성체를 받아 모실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웃음기 띤 얼굴은 피해야 한다는 당위성, 그것이 구원을 멀리 있게 하는지 모르겠다. 파안대소로 성체를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우리의 상상 속에 구원은 멀지 않았다. [월간빛, 2017년 9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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