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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의 세계: 예후 왕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9 조회수5,151 추천수0

[성경의 세계] 예후 왕조 (1)

 

 

예후는 쿠데타로 북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남북이 갈라지고 110년 지났을 때다. 그새 4번의 쿠데타가 있었다. 그때마다 왕조가 바뀌고 피의 숙청이 있었다. 10지파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첫 쿠데타는 이사카르 지파 바아사가 일으켰다. 둘째 임금 나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다. 나답은 에프라임 지파였다. 하지만 왕조는 아들 대서 끝난다. 지므리의 2번 쿠데타에 살해된 것. 지므리 역시 3번 쿠데타로 죽는다. 아합의 부친 오므리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4번은 예후 쿠데타. 예후 왕조 역시 5번 쿠데타로 끝난다. 15대 임금 살룸이 일으켰다(2열왕 15,10). 남쪽도 쿠데타가 있었지만 왕조가 바뀌진 않았다. 꼭두각시 왕이라도 다윗의 직계를 앉혔던 것이다.

 

정권을 쥔 예후는 숙청과 개혁을 단행한다. 과정은 잔혹했다.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머리를 성문 어귀에 쌓아뒀다(2열왕 10,8). 아합과 연관된 자는 모두 살해했다. 공포 분위기였다. 하지만 국내 사정보다 나라밖 상황이 더 흉흉했다. 동쪽 아시리아가 세력을 떨치며 등장했기 때문이다. 남북 공조는 깨졌고 페니키아 동맹은 끊겼다. 아람과의 연대도 무너진 뒤였다. 예후는 어쩔 수 없이 아시리아에 굴복한다. 속국이 된 것이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조공을 바쳤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검은 오벨리스크엔 복종을 맹세하며 엎드린 예후의 그림이 있다. 뒤에는 이스라엘 시종들이 예물을 들고 서 있다. 아시리아 왕은 살만에세르 3세였다.

 

군인이었던 예후는 국경에서 전차부대를 지휘했다. 당시 전차는 바퀴가 둘 달린 수레로 전투의 핵심장비였다. 전차가 많을수록 강한 군대로 평가받던 시대였다. 이런 부대의 책임자였기에 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예언자 엘리사는 그를 새 임금으로 찍는다(2열왕 9,3). 모반이었다. 그리곤 젊은 예언자를 보내 예후를 만나게 했다. 젊은이는 홀로 기름 부으며 예후를 왕으로 선언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승자의 기록이었기에 전승되어 왔을 것이다.

 

반란은 아람족과 전쟁 중에 일어났다(2열왕 9,14). 임금은 부상당해 치료받던 중이었다. 틈새를 이용해 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아합 왕조는 이방인과 동맹을 맺고 문화와 자본을 받아들였다. 경제적 득은 있었지만 범람하는 우상숭배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바알 신앙이 치고 들어왔다. 전통신앙 수호자들은 전전긍긍했다. 주님의 진노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예언자 그룹은 반란을 기획했고 군부를 움직였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 연중 제2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예후 왕조 (2)

 

 

예후는 왕이 되자 이방인과의 관계를 끊었다.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페니키아엔 등을 돌렸고 바알 신전은 철저히 파괴했다. 하지만 베텔과 단의 금송아지 상은 철거하지 않았다. 우상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뒀다. 단과 베텔은 이스라엘 북쪽 끝과 남쪽 끝에 있던 도시다. 그곳에 금송아지 상을 세운 건 민중이 남쪽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이 아니더라도 단과 베텔에서 제사드리라는 것이었다. 앞선 왕조들의 몰락 이유다. 그런 스토리를 알면서도 예후는 방치한 것이다. 그의 왕조 역시 살룸의 쿠데타로 끝나게 된다.

당시 각광받던 예언자는 엘리사(Elisha)였다. 쿠데타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예후의 지나친 학살에 제동을 걸 수 있었건만 침묵했다. 이제벨 세력 청산이 우상숭배 근절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상 문제는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남쪽엔 이제벨 딸 아탈야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 나라에서 친족이 몰살되는데 무심할리 없다. 이후 남과 북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아합 때 시작된 화합 무드는 깨진 것이다. 같은 조상과 같은 신앙을 공유한 공동체가 다시 원수가 되었다. 남과 북엔 예언자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힘을 쓰지 못했다. 훗날 호세아는 예후를 비난하는 예언을 남겼다(호세 1,4).

엘리사는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예언자들 대부분이 비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엘리사는 예외였다. 하지만 겸손했고 청렴하게 처신했다. 열왕기 하권 4장과 5장은 그가 행한 기적 이야기다. 제자의 아내를 위해 기름이 많아지게 했으며 보리빵 스무 개로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까지도 살렸다(2열왕 4,35). 5장은 아람의 군인 나아만을 낫게 하는 이야기다. 나병에 걸린 그가 엘리사 지시대로 강물에 몸을 담그자 병이 낫는다(2열왕 5,14). 간단한 사실이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람은 이방인의 나라다. 그곳까지 엘리사의 위대함은 알려졌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평범한 농부였지만 부르심을 받자 즉시 응답했다. 그리곤 동네 사람들을 불러 성대한 송별식을 가졌다(1열왕 19,21).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허름한 옷에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대머리였고 가끔 아이들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2열왕 2,23). 기적의 예언자였지만 소박했던 것이다. 공포정치의 예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이 아람과 전쟁 중일 때 선종했다(2열왕 13.20). 당시 임금은 예후의 손자 여호아스였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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