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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주님의 기도가 지닌 낯설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8 조회수4,594 추천수1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주님의 기도’가 지닌 낯설음(Die Fremdheit des Vaterunsers)

 

 

주님의 기도보다 더 유명한 그리스도교 기도도 없겠지요. 수많은 이들이 이 기도를 바칩니다. 날마다 바치는 이들도 많고요. 주님의 기도는 이처럼 너무나 익숙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아주 잘 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의 기도는 모순적인 기도입니다. 그 자체로 당연하다고 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낯설기까지 합니다. 이 낯설음을 넘어서야만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정말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바치는 기도니까요.

 

 

형식의 낯설음

 

주님의 기도는 아주 짧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짧다는 점이야말로 아주 낯선 것이지요. 모든 종교에서 기도는 대개 길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군가는 주님의 기도가 일종의 교육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은 다만 제자들이 바쳐야 하는 기도의 내용을 간단히 가르쳐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기도할 때 짧게 하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을 많이 해야 그들의 신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며 빈말을 되풀이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 6,7-8 참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6,32 참조).

 

주님의 기도가 순전히 청원의 기도라는 점도 우리에게는 낯선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주님의 기도는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끝맺음이 이상하다고 여긴 나머지, 적어도 1세기 말엽에는 다음과 같은 찬미의 구절이 끝에 첨가되었습니다.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후대에 덧붙여진 이러한 영광송의 구절은 물론 원형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수사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찌하여 주님의 기도는 순전히 청원의 기도로만 이루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탄원 외에 감사와 찬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선포 활동 처음부터 맞닥뜨린 불신이 하도 커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바쳐야 하는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간청의 기도일 수밖에 없었지요.

 

마지막으로,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의 형식도 매우 낯선 것입니다. 흔하지 않은 수동태의 형식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 가운데 누가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방바닥이 깨끗해지기를!”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서 문법적으로 ‘간접 화법’을 사용하십니다. 곧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열린 채로 두시지요. 하느님 몸소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몸소 당신 나라를 오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 나라를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몸소 세상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분의 뜻을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의 낯설음 - 전반부

 

1. 첫 번째 청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지금까지 주님의 기도가 지닌 형식적인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 역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입니다. 곧 첫 번째 청원에서 곧바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첫 번째 청원이 고해성사의 옛 목록에 나오는 그런 의미에만 그칠 리는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품위를 나타냈습니다. 권위와 존엄성, 영예와 명성, 존경을 의미했지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삭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예를 영구히 박탈하고,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을 지워 없앤다는 뜻이었습니다(시편 109,13 참조). 하느님 백성이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정하게 하고 훼손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시편 79,10; 115,2) 하며 조롱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탈출 19,5-6 참조)은 하느님만이 홀로 주님이심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드높여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에제키엘서 36장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 첫 번째 청원은 무엇보다 여기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요. 에제키엘서 36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몸소 그들을 다른 민족들에게서 다시 데려오고 모아들여 정결하게 해주시겠다고요. 그리되면, 민족들 사이에서 더렵혀진 당신의 이름이 다시 거룩하게 되고, 더 이상 조롱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에제 36,19-28 참조).

 

2. 두 번째 청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두 번째 청원 역시 우리에게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듣는 즉시 우리는 먼저 ‘하늘’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론 ‘하늘나라’라고 표기한 마태오 복음서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를 잘못 이해하지만, ‘하늘나라’는 당시 ‘하느님 나라’나 ‘하느님의 다스림’과 동일한 의미였지요.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 않고, 그 대신에 ‘거룩하신 분’ 또는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치와 같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역사 전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숱한 역경과 고통, 비참함과 관련됩니다.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할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해야 합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시간 오늘 여기에!

 

3. 세 번째 청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세 번째 청원은 어떤가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청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곧 이 청원을 각자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행할 힘을 주시라고 청합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하느님의 뜻과 씨름하십니다(루카 22,42 참조). 곧 정말로 당신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피하는 게 더 나은 것은 아닌지, 계속 살아남아 이 위험한 예루살렘을 등지고 멀리 갈릴래아로 도주해 거기서 하느님 나라를 계속 선포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은 아닌지 고뇌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되면 성경이 말하는, 우리에게는 낯선 그 핵심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에페소서 1장 5-11절이나 이사야서 55장 6절에서 11절을 보십시오. 또는 성경 외에도 당시 유다인들의 신학을 보면, 하느님의 ‘뜻’은 역사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의미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그분이 원하시고 계획하고 작정하시는 바, 세상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통해 당신이 이루시려는 바, 오래전 이미 몸소 결심하신 바를 의미했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이 자유로운 뜻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이 계획에 공감하게 될까요?

 

아무튼 전반부의 세 청원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관심사는 모두 동일합니다. 곧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과 배려가 그것이지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그분의 다스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두 번째 청원). 그분의 다스림으로 역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넘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세상에서 믿음과 거룩함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민족들이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첫 번째 청원). 그렇게 하여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그분의 계획이 실현되어야 합니다(세 번째 청원).

 

 

내용의 낯설음 - 후반부

 

4. 네 번째 청원: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제 후반부에서 주님의 기도는 비로소 인간에 대한 관심사로 옮겨갑니다. 전반부가 하느님의 계획과 배려에 관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인간의 근심과 걱정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렇다고 이 후반부의 청원이 일반적인 인간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우선적으로 제자들과 관련됩니다. 이는 네 번째 청원에서부터 곧바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네 번째 청원을 두고 오늘날 해석자들은 너무 성급하게 이를 보편적인 기도로 이해합니다. 곧 ‘굶주리는 민족들을 위한 도움’이나 ‘세계를 위한 빵’의 기도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는 호의적인 해석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입니다(루카 11,1 참조). 후반부의 청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늘 길 위의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을 떠도는 것이지요. 아침마다 그들은, 그날 밤은 어디에서 묵고 어디에 머리를 누이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누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그날 하루를 위한 빵’을 청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당시 시간관념으로 하루는 저녁에 시작되었지요.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언어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은 루카 복음서 11장 3절에서 온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원래 ‘오늘’이라고 되어 있지요(마태 6,11). 따라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표현을 결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용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epousios)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도 외에는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인데, 아마도 ‘임박하다’ ‘이어지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에피에나이(epienai)에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서 6장 11절은 이렇게 옮길 수 있겠지요. “당장 눈앞에 닥친 이 하루를 위한 빵을 오늘 저희에게 주소서!”

 

이런 해석이야말로 제자들이 놓인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제자들은 계획을 세워서도 미리 대비해서도 안 됩니다. 비축해 놓은 것들을 늘 짊어지고 다녀서도 미래를 걱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오늘’만을 생각하면 됩니다(마태 6,34 참조). 제자들은 하늘의 아버지이신 아빠(abba)에게 신뢰를 두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는 지상의 아버지를 대신하십니다. 그들은 ‘하늘의 새들’과 ‘들판의 나리꽃’마냥,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마태 6,25-34 참조).

 

물론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이런 절대적 신뢰는 무책임하거나 비합리적인 방종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에는 견고한 토대가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지역 어디에나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친구들, 동조자들이 그 토대입니다. 그들은 밤이면 제자들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는 이들이었지요(마태 10,11-13; 루카10,5-7; 마르 6,10 참조).

 

주님의 기도 네 번째 청원은 바로 ‘예수 운동’의 그러한 연대와 함께함을 전제합니다. 모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난 제자들에게는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집’이고 ‘가족’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반대로 지역의 추종자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도움으로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네 번째 청원이 지닌 본래의 상황과 그 의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얼마나 낯선 것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5. 다섯 번째 청원: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다섯 번째 청원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비와 화해가 일차적 관심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형제자매다!”라는 인류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안에서 그리고 제자들과 연결된 이들 안에서의 용서가 관건입니다. 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물러설 데가 없는 곳에서는 날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는 화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6. 여섯 번째 청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마도 주님의 기도는 본래 이 여섯 번째 청원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째 청원이라고 부르는 “악에서 구하소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추가되었지요. 하지만 교회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이 추가 부분이 예수님의 생각을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튼 이 여섯 번째 청원이야말로 오늘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들에게 가장 낯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유혹을 당하도록 하시는 분일까요? 자주 즐겨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만 이 여섯 번째 청원만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편지를 저는 자주 받습니다. 이 청원을 뒤집어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바꾸어 기도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저희가 유혹에 빠져 있을 때, 저희를 인도하소서!”

 

이미 야고보 서간의 저자가 그러한 의문에 답변을 제시했습니다(야고 1,13-14 참조). 여섯 번째 청원의 배경을 이루는 구약성경의 사고가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낯선 것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시험하기도 하십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입증하게 하거나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지요. 이를테면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창세 22장 참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신명 8,2 참조).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도 모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단련해야 합니다(로마 5,3-5 참조). 하지만 그것이 너무 힘에 겹거나 넘어질 염려가 있는 이들에게는(1코린 10,13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라고 청해야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청원의 내용입니다.

 

 

낯설음에서 우리의 기도로

 

지금까지 주님의 기도가 지닌 낯설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 낯설음을 적당히 무마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우리는 먼저 제자들이 놓였던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도에 담긴 참된 의미가 우리에게 열릴 수 있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맨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저녁에 누군가 우리를 맞이해 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무덥고 메마른 열대의 땅들을 맨발로 떠돌아야 할까요? 도시마다 광장에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공개적으로 목청껏 외쳐야 할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픈 이들과 나병 환자들을 고쳐주어야 할까요? 우리는 다른 환경, 다른 문화, 다른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많습니다. 한번 우리 자신이 아니라 중국, 북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시리아, 소말리아, 수단, 이집트 등에 있는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그들은 자주 커다란 위험을 겪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지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마다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하고,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믿음 안에서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와 백성 사이의 차이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해와 차별을 받고, 그리스도 신앙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그런 곳에서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까운 미래에는 수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박해를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무관심한 환경, 아니 예수님의 복음 자체가 아예 낯선 환경 속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과는 다르게,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지켜가야 할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는 더욱 차별화된 ‘삶의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각 청원마다,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전제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역동적으로 확산되는 ‘예수 운동’ 한가운데 있었지요. 빵에 대한 청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용서에 대한 청원도 그렇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여섯 번째 청원이 말하는 유혹은 보통의 일상적인 삶의 유혹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의 소명을 잃어버릴 위험에 관한 것이지요. 곧 자신이 받은 사명을 포기하고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순응할 위험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의 청원도 일반적인 인간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범세계적인 윤리나 성숙하고 모범적인 각 인격체의 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지요. 에제키엘서 36장 16-38절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모두 하느님 백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하느님 백성은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는 하느님 구원 활동의 도구입니다.

 

주님 이름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도래와 세상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성경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 백성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자비의 거울이기 때문이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본래 성경적인 이 주제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습니다. 올바로 이해한다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백성’ 망각 증상을 치유하고 우리를 다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백성의 본질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안내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게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까요?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합송하기 직전에 말하듯이, 감히 ‘삼가’ 이 기도를 드려도 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너무 성급한 대답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세상 모든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기도는 위험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였던 바로 그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곧 세상의 변화였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러나 또 우리의 온전한 투신이 필요한 변화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동일한 뿌리에 따라 우리도 살아야함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그 뿌리지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예수님이 원하셨던 바를 우리도 똑같이 원해야 함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모이고 일치하며 거룩하게 되는 것, 그래서 이 하느님 백성을 통해 세상도 변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바이지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고립된 신앙이 아니라 서로 연대하는 가운데 함께하는 삶을 전제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사셨던 그 철저함으로 사는 것을, 아니 적어도 그 철저함을 갈망하며 사는 것을 전제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도래가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느님의 백성임이 증명될 때, 우리는 감히 주님의 기도를 바쳐도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맡겨주신 이 기도가 우리에게도 참된 고향이 되겠지요.

 

 

주님의 기도에 부쳐

 

모든 것이 그저 이론에만 그치지 않도록, 저는 여기서 주님의 기도가 지닌 본래 의미, 곧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흘러나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 쓰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는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당신의 공동체, 당신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저희는 당신을 우리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빠(abba), 사랑하는 아버지!

 

흩어지고 분열된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그들이 참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온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이 공경을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로 묶어 일치시킬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당신 나라, 당신의 다스림이 세상에 오게 하소서. 당신만이 홀로 저희 주님이시기를! 저희가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들을 저희는 더 이상 섬기지 않으렵니다. 저희가 당신 백성이 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힘을 주소서. 폭력과 미움 없이 당신의 평화 속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당신의 계획을 완성하소서. 영원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당신이 품으셨던 그 계획을! 당신의 계획이 하늘에서 땅 위로, 당신 마음에서 저희 마음으로 흐르게 하소서. 저희 공동체가 세상을 위한 당신의 도구, 당신의 성사가 될 힘을 주소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당신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오늘, 이 하루만큼은 꼭 필요한 것을 주소서. 저희의 으뜸가는 관심사는 당신 나라이고, 다른 모든 것보다 그것이 저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 나라를 증거하는 일이 온통 저희를 사로잡고, 그리하여 저희가 미리 준비하거나 늘 저희 자신만을 생각할 여유마저도 없어야 합니다. 서로 돕고 서로 배려할 힘을 주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저희는 당신에게 진 빚을, 그리고 늘 그대로 남아 있을 그 빚을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데에 저희는 늘 부족합니다. 그러니 저희의 모든 빚을 없애주소서. 저희 또한 형제자매가 저희에게 빚진 것을 모두 없애주지 않는다면, 감히 당신께 그런 청을 드릴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저희의 가련한 이 역사 한가운데로 당신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를 거슬러 저희에게 유혹이 닥칩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유혹, 주님을 따르는 저희의 길과 소명을 포기할 유혹, 당신 교회에 실망하고 세상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더 이상 믿지 않을 유혹이 닥칩니다.

 

그러한 유혹에 저희가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유혹에 굴하지 않게 하시고, 악의 치명적인 사슬에서 저희를 풀어 주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풀어 쓴 기도가 물론 주님의 기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훨씬 더 낫습니다. 사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고 명료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분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교회가 전해준 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날마다 바쳐야 합니다. 천천히, 깊이 새기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값진 보물마냥 주님의 기도를 잘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으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07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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