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37) 예수님을 따르려면(루카 9.57-62)
제자 되려면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 따라야 -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의 자세에 관한 루카복음의 내용은 단지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만이 아니라 인생길을 살아가면서 어떤 자세와 각오로 그 길을 가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해 준다. 사진은 이집트의 시나이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 가톨릭평화신문 DB.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셨으나 냉대를 받으신 예수님.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절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향하시는 예루살렘에서 영광보다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셨을 것입니다. 루카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관련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님 길을 따르려는 이들 이야기는 “그들이 길을 가는데…”(9,57)로 시작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물론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합니다만, 수난과 죽음이 먼저입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나섭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9,57)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따라 나서지는 않습니다. 웬만큼 아는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해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시 그 사람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따라 나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스승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다부진 의욕을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봤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그 멋진 일들, 곧 병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빵을 많게 하는 놀라운 일들을 계속 보게 될 터이고 그분의 제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 첫째 사람의 청원에 예수님께서는 ‘된다’ 또는 ‘안 된다’ 하는 대답은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실 따름입니다.(9,58) 그런데 이 말씀이 오히려 충격적입니다. 그냥 “안 된다” 하시면 그만일 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계시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분명 기쁨입니다. 하지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예수님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비참한 처지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기쁨은 따로 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10,21 참조) 첫째 사람에게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둘째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말씀에 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시지요.(9,59-60)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할 일이 전혀 아닌 듯합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일이라면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까닭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그만큼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많은 성경학자는 풀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예수님의 일행에 합류했다면, 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아버지의 장례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일을 떠올리면서 먼저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고 청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사람은 ‘나를 따라라’ 하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할 태세가 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 사람은 첫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건을 답니다.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한 다음에 따르겠다는 겁니다. 스승을 따라서 길을 떠나기에 앞서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는 것 역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9,61-62) 이 셋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다는 점에서 첫째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둘째 사람과 비슷합니다. 셋째 사람에 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역시 둘째 사람의 청에 대한 답변과 마찬가지로 가혹해 보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셋째 사람 또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 사이에 끼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셋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미 나를 따라 나섰으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느냐.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관련한 세 사람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혹은 따르려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이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에서도 초연하게 복음 선포에 매진하라는 것으로, 둘째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제자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열 일을 제쳐놓고 복음 선포에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셋째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자꾸 과거의 삶에 연연하거나 한눈팔지 말고 그리스도 신자로서 제대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기본자세에 관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봅니다. 첫째, 인생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투신하기로 했으면, 오로지 그 길에 매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때로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에 놓일지라도 그것이 두려워 가던 길을 포기해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목표를 정하고 덤벼들기 전에 계획을 잘 세우고 차질없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하는 부르심은 우리 인생살이에서 “호기”,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다른 일로 꾸물거리느라고 그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를 우리는 직ㆍ간접으로 체험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단 결단을 내렸으면 다른 일에 신경을 쓰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기웃거리기 시작하면 이것저것 다 놓치기에 십상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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