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공동체 “우리가 남이가!” 유명 정치인이 부산의 한 식당에서 남긴 이 말은 한국 현대사 안에서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권력층의 잇속을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말이었다. 그 댓가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인권이나 삶의 고유성과 주체성은 심각하게 짓밟혔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오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가 철 지난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로 규정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선뜻 답하지 못한다. 총과 칼로 대변되는 권력의 아집은 끝이 났을지 모르겠으나 IMF이후 자본에 따른 권력의 집중 현상은 우리를 더욱 ‘하나(?)’되게 만들었다. 속이 뒤집어져도 돈 있는 이, 돈을 줄 수 있는 이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인간꼴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저는 먼지 뒤집어 쓴 채로 막노동을 하지만 자식은 절대로 이 일을 시킬 수 없다며 어떻게든 공부시켜 남보다 잘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 상위 5%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이른바 ‘스카이 대학’은 공부에 흥미가 있건 없건 모든 학생들의 로망이 되었고, 특목고·자사고가 강남지역 학생들로 대부분 채워지는 5%가 95%의 공부방식이어야 하고 그게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는 현실적이고 당연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철저히 ‘하나’로 엮어 놓았다. 행복하게 건강하게 인간답게 잘 사는 게 결국 ‘돈이 있어야 돼.’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사회가 된 건 ‘우리가 남이가!’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사실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너무 세상을 비관적이고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가 남이가!’를 달리 생각해 보면 이건 어떤가? 남이 아니라 한 형제자매요, 서로가 연민으로,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말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칠 수만 있다면 이건 꽤나 훌륭한 신앙적 슬로건일 수 있다는 생각, 어떤가? 유학시절 한국에서는 건배할 때 어떤 말을 하느냐고 친구들이 물어왔다. 재미난 생각에 ‘우리가 남이가!’를 가르쳐줬다. 잔을 부딪칠 때마다 내가 먼저 ‘우리가’를 외쳤고, 프랑스 친구들은 ‘남이가’를 따라 외쳤다. 뜻을 설명해줬더니, 놀랍게도 좋은 말이라며 다들 웃었다. 시민의식을 가진 프랑스 사람에게는 ‘우리는 서로가 연대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겠지만 독재와 그로 인한 억압을 살아 온 우리에겐 ‘튀면 죽는다. 2등 하는 게 안전하다.’라는 논리로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질 텐데···, 프랑스 친구들과 한 잔 할 때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는 늘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똑같은 색과 똑같은 행동을 해야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 다름을 참아주고 지켜봐주는 것, 설사 그것이 내 속을 뒤집어 놓더라도 참아주고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공동체다. 세상은 같이 움직이는데 아주 능수능란하다. 사실 이 ‘하나됨’은 서로의 마음이 통해서라기보다 이해관계에 따른 타협의 결과일 때가 많다. 타협과 갈등 사이 긴장된 줄타기를 통해 겨우 구축해 놓은 삶의 조건이 흔들릴 때 세상은 철저히 하나된다. 누구나 죽어가면서 화장터가 제 동네에 들어오는 걸 결사 반대하며, 누구나 쓰레기를 생산하는 데 열심이면서 제 동네에 쓰레기 처리장이 들어오는 건 죽어도 반대인 현상들을 보면, 그만큼 하나되는 일에 열심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예수가 잡힐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게 묘사되지만 그 속내에 있어선 그들은 철저히 하나가 된다. 예컨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인 유다와 군대, 그리고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나가 되어 예수를 잡으러 왔다.(요한 18,3 ; 루카 22,52)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유다 사회 지도자 계급의 구성원들이었다. 수석사제들은 대사제를 중심으로 로마의 권력에 부역했으나 유다 사회를 향한 그들의 극우적 행태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중개자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이 지상에서 지니는 존재로 치장했다. 현실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민중은 그들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의 거짓과 위선을 모를 리 없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율법을 지켰고 율법을 공부했으며, 나름 선비처럼 올곧게 살았다. 바리사이들 눈에는 로마 권력에 아부하는 수석사제들이 민족의 반역자로 비쳤고, 율법을 배반한 무리로 여겨졌다.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저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실은 ‘원수지간’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예수를 잡으려는 데 두 무리는 철저히 하나가 된다. 철저히 ‘공동체’가 된다. 뜻이 달라도, 신념이 달라도 제 잇속을 위해 하나가 되는 것, 그게 세속이 말하는 공동체의 단면이다. 말하자면 철저히 ‘우리가 남이가!’를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두고 외친다. 예수는 ‘우리가 남이가!’ 때문에 죽은 것이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줄곧 공동체를 강조한다. 예수가 죽고 부활한 후에 교회 공동체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예수의 삶이 제공한 수많은 가르침과 그 의미를 채 소화하기도 전에, 교회는 세상 속에 살아가야 할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사도 바오로와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고 나서는 더더욱 집안단속이 필요했다. 박해의 긴장 속에서도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언을 간직하며 믿음의 삶을 이어 나갔다. 요즘처럼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내어야 하는 게 박해 속 초대 교회가 견지해야 할 믿음의 우선 과제였다. 그 과제는 세상과 논쟁을 하거나 저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논쟁과 저항은 이미 그 체제의 논리 안에 흡수되어 버린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시부모 욕하다가 시부모 닮아버리는 게’ 우리 경험칙 아닌가? 초대 교회의 집안단속은 체제를 뛰어넘는 데 있었다.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공동체는 세상과 타인을 꺾어놓는 것이 아닌, 세상과 타인을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삼았다. 예수가 그리 살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중심은 당연 예수 그리스도였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2-23) 사회적 제도나 체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만물이 하나로 이어지는 일치였다. 하여 예수가 중심인 공동체는, 이해관계에 따른 구별된 무리나 특정 계급에서 보여지는 분리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대개의 이단과 사이비 집단의 행동방식은 분리의식에 근거한다. 1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이라는 이단의 무리는 비그리스도교적 집단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 남보다 더 잘 살려는 의식, 이렇게 살아야 특별히 선별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단이 등장했고 그 존재와 행동의 방식은 몬타니즘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만물이 하나되는 건, 만물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다양성을 엮어내는 사회적 연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예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장벽과 적개심을 허무는 데 그 가치가 있다. 피조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고, 제 신념이나 이상으로 이웃을 갈라 세우지 않는 것, 그것이 교회가 말하는 공동체의 근본 정신이다. 체제를 뛰어넘는 것, 주류니 프레임이니 하는 것들에 목매달지 않는 것,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느라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교회는 폐쇄성을 경계하는 개방적 개혁을 통해 세상과 더불어 제 정체성을 꾸준히 가꾸어 나가야 한다. 세상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만큼 교회 공동체에 해로운 것은 없다. 교회는 세상보다 훌륭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안에 살기 위해 세워졌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훌륭하지도 않았고,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세상보다 거룩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신자들이 세상보다 성숙하다고 볼 수 없다. 교회 공동체는 ‘우리가 남이가!’로 외칠 게 아니라 겸손과 온유로 서로 인내심 안에서 받아주는 노력을 연마해야 한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2-4) 겸손과 온유는 지성의 축적이나 단련으로 이루어지는 성숙한 이들의 덕목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가난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몸에 밴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이다. 어떤 이들은 제 이해와 배려의 폭이 대양같이 넓어 세상 모든 것을 받아낼 수 있는 여유와 품위를 겸손과 온유와 동일시한다.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과 온유는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듯 하지만 실은 ‘난 이렇게 깨달음으로 너를 받아들이는데 넌 아직 옹졸하고 편협하게 세상을 사는구나.’하는 얼마간의 조소가 미소로 분하여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미소는 절대 함께하지 않겠다는, 너는 너대로 살되 나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장벽과 적개심의 또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교회 공동체는 옹졸하더라도, 편협하더라도 제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렇게밖에 살지 못한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아’와 화해하는 이들에게서 가능하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는 어쩌면 죄인을 부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혼자 깨달은 척 교만함을 자랑하며 의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답을 하지 않았기에 죄인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 게 아닌가 싶다. 죄인이 겸손하고 온유하다.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라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스스로 능력이, 그 능력을 다져갈 여유가 없어서 낮출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주어졌다. 제 품위와 교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속내는 감춘 채 의인인 척, 성숙한 척 하는 이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제 위신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요한 3서 참조) 얼마 전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수녀님들 연피정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수녀님들의 회칙, ‘생명의 책’의 한 조항이 너무나 가슴에 박혀 지금껏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개인의 고유성을 간직한 채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37항 “형제적 생활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지닌 채 자기를 이웃에게 열도록 초대한다.”) 제 삶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채 이웃에게 열린 자, 그에게서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다. 지금의 제 모습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실은 지금의 제 모습이 싫어서가 아닐까, 되돌아 보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모두에게 찬사받는 도인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보듬어 주는 곳이다. 신앙적으로 잘 살기 위해 이런저런 기준을 만들어 모든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행태와 ‘우리가 남이가!’는 닮아있다. 개개인의 고유성이 사라진 곳에 아무리 좋은 체제와 규범을 갖다 놓더라도 그건 인간의 공동체가 아니라 동물의 무리거나 쇳덩어리의 조합일 뿐이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나와 너의 우애로 이루어지는 지금에 대한 끊임없는 수용이어야 한다. [월간빛, 2017년 1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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