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기혼 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흡수될 때 남쪽 임금은 히즈키야였다.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동족 10지파의 증발이었다. 남은 지파는 남쪽의 유다와 벤야민뿐이었다.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본관(本貫)과 비슷한 개념이다. 본관은 조상이 살던 거주지로 성과 본관이 같으면 같은 핏줄로 여겼다. 12지파는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가나안에 정착해 이민족과 부딪치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국가체제를 갖추고 인구가 늘어날 때 해체된 것이다. 우상숭배의 보속이라 생각했다. 계율을 어긴 벌이라 판단했다. 제관 계급과 예언자들의 진단이었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한다. 단순 방어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남은 지파를 지켜야 하는 절박 감속의 대응이었다. 첫 조치가 물의 확보였다. 포위될 때를 가상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산 위의 도시로 물은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서 끌어왔다. 그곳의 한 동굴에서 물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동굴 속 샘을 기혼 샘이라 했다. 기혼(Gihon)은 분출이란 뜻이다. 지하수가 콸콸 솟는다는 의미다. 예루살렘은 원래 여부스족 땅이었고 수로는 그들 작품이다. 다윗은 이 지역을 공격할 때 수로를 이용해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2사무 5,8). 이런 역사가 있었기에 히즈키야는 샘이 있는 동굴입구를 막고 수로는 지하로 뚫었다. 히즈키야 수로다(2열왕 20,20). 이후 성 밖 샘물은 지하터널을 통해 안으로 끌어들였고 물 저장소가 실로암 못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장소다(요한 9,7). 히즈키야 터널은 533m로 알려져 있다. 폭 60cm 높이는 1m가 넘는다. 학자들은 바위에 갈라져 있던 틈새를 따라 터널을 판 것으로 추정한다. 양쪽에서 파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다. 터널 완공 후 양쪽에서 파고 들어가다 만난 곳에 비문(碑文)을 새겼는데 1880년 발견되었다. 여섯 줄로 1백77글자가 보존되어 있다. 기원전 8세기 작품으로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윗은 기혼 샘에서 솔로몬을 성별하라는 왕명을 내린다(1열왕 1,33). 당시 실세였던 대사제 차독과 예언자 나탄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선언했다. 기혼 샘은 그만큼 소중한 장소였던 것이다. 히즈키야의 뒤를 이은 므나쎄 왕은 기혼 샘 바깥에 외성을 쌓아 보호했다(2역대 33,14). 아시리아 산헤립 왕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두 번 포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히즈키야 방어벽 덕분이다. 두 번째 포위에선 쿠데타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했다. [2017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마산 12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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