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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41: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03 조회수8,861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가복음 중심으로] (41)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경청, 하느님 사랑의 첫 걸음

 

 

-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와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베타니아 라자로 부활 기념 성당 그림.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있었던 이 일화는 짧은 이야기입니다만 깊이 생각하고 되새겨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도입(10,38)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해 길을 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자매가 살고 있었고,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을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던 마을은 요한복음을 따르면 베타니아입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3㎞쯤 떨어진 곳으로 올리브 산 동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요. 루카복음에서 이 일화가 위치하는 자리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의 앞 부분입니다. 일정으로 본다면 아직 예루살렘까지는 많은 여정이 남아 있는 셈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으로 볼 때 루카복음에서 베타니아가 너무 빨리 나타납니다. 이런 이유에서 루카는 마을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루카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 앞쪽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활동이 더 중요하냐 관상이 더 중요하냐의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사진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두 자매의 오빠 라자로가 살았던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 부활 기념 성당.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이야기가 나온다.(요한 11,1-44 참조)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전개 - 절정(10,39-40)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르타네 집 안에 들어와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은 제자의 자세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자세라면 대단히 공손한 자세임이 분명합니다. 언니는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자신은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동생 마리아는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모습이 언니 마르타에게는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하소연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집에 귀한 손님을 모시면 그에 맞게 접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마르타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을 가늠해 보면 예수님만 오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따라왔겠지요. 그리고 이 일화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두 자매에게는 라자로라는 오빠도 있었습니다.(요한 11,1 이하 참조) 그렇다면 집 안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그 시중을 언니인 마르타 혼자 감당하려니까 어쩌면 눈코 뜰새 없이 바빴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쳐다보니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저러가다 곧 도와주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려도 동생은 일어날 낌새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하면서 하소연합니다. 그렇다면 마르타의 불평 또는 하소연은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반전 - 대단원(10,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의 예수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마르타야, 마르타야!” 하고 이름을 부르시는 부분입니다. 두 번이나 이름을 거푸 부른다는 것은 마르타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둘째 부분은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많은 일이란 음식을 준비해 손님을 대접하고 시중드는 일일 것입니다. 집에 주님을 모셨는데 정성껏 차린 음식을 접대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시중 드는 일을 소홀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 가지는 마리아가 선택한 몫, 바로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시는 셋째 부분입니다. 말씀에 맛들이면 다른 데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삶, 특별히 제자들의 삶에서 어디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처럼 이야기해 왔습니다. 마르타의 모습은 활동적인 삶을, 마리아의 태도는 관상적인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겼고,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활동보다는 관상이, 일보다는 기도가 우선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낫다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또 더 우선하는지를 깊이 헤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마르타로서는 예수님을 위한 시중을 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이 이야기의 맥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등 시중을 들기보다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기를 더 바라셨음이 분명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하시면서 타이르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가 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을 실천하려면 잘 들어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예루살렘 인근의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를 루카 복음사가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여정의 앞쪽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루카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이어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랑의 이중 계명과 관련해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예시하는 구체적 사례입니다. 그리고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봉사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 사랑을 외면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 비유의 연장선상에서 그러면 참된 하느님 사랑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처럼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데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구체적인 사례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웃 사랑)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하느님 사랑)로 제시하고자 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 있었던 이 일화에서 베타니아라는 장소를 삭제하고 현재의 자리에 배치했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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