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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의 세계: 바빌론 유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08 조회수11,688 추천수0

[성경의 세계] 바빌론 유배 (1)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다(BC 931년). 북쪽은 10지파 연합체였기에 이스라엘 국명을 고수했고 남쪽은 유다왕국이라 했다. 유다 지파가 절대다수였기 때문이다. 211년 뒤 북쪽이 먼저 망한다(BC 722년). 백성들은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고 남은 자들은 이주해온 이방인과 섞여 살아야 했다. 사마리아인 조상이다.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를 막아냈다. 그러나 136년 뒤 바빌론 침략으로 결국 멸망한다. 왕과 백성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BC 586년). 바빌론 유배다. 포로지에서는 바빌론 말인 아람어를 사용했다. 이후 로마시대까지 아람어는 유다인의 일상어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배는 3번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기원전 597년. 바빌론 군대가 여호야킴 반란을 제압한 뒤다. 전투 중 여호야킴은 죽고 아들 여호야킨이 왕이 되어 버틴다. 그러나 3달 뒤 항복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왕과 지배계급을 포로로 데려갔다. 이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이가 치드키야다. 그런데 그가 11년 뒤 반기를 들자 유다왕국을 멸망시켜버린다. BC 586년이다. 왕과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다. 두 번째 유배다. 3번째는 BC 582년 이었다. 바빌론이 임명한 그달야 총독이 암살되자 연관된 이들을 모두 잡아간 것이다. 전체 포로 숫자는 확실치 않다. 오천에서 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2열왕 24,16. 예레 52,30).

 

유다인은 유배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공동체를 형성했고 집과 땅도 소유했으며(예레 29,5) 예루살렘과 서신도 가능했다(예레 29,1). 정착지는 크바르 강변으로 바빌론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들은 텔아비브라 불렀다(에제 3,15). 텔은 언덕이며 아비브는 봄이다. 해방(봄)을 희망한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현재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Tel-Abib)는 유배지의 이 이름을 되살린 것이다. 1909년 황무지였던 땅을 매입해 신도시로 만들었다. 국제공항이 있으며 이스라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 왕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다. 이듬해(BC 538년) 키루스는 유다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다. 바빌론 유배가 끝난 것이다. 페르시아가 귀환을 허락한 건 정치적 배려였다. 가나안 땅에 우호 세력을 심어 이집트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유다인은 키루스 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표현했다. 메시아 칭호를 준 것이다(이사 45,1). [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마산 12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바빌론 유배 (2)

 

 

바빌론 유배에서 유대인은 지난날을 돌아봤다. 선민 이스라엘이 어쩌다 이방인 포로가 되었는지 돌아봤다. 우상숭배의 벌로 받아들였다. 율법을 어긴 보속이라 여겼다. 다시 계약에 충실하기 위해 전승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서가 편집되고 모세오경의 틀이 갖추어진다. 구약성경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배생활 최대 수확이었다. 다윗은 왕이 되자 예루살렘 제사만 허용했다. 다른 장소의 제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후대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사라진 것이다. 제사드릴 장소가 없어진 셈이다. 충격이었다. 종교 예식은 제사보다 말씀을 듣는 쪽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레 안식일과 축제일이 엄격하게 지켜졌다. 할례는 더욱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후 율법과 전통이 믿음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전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들도 나타났다. 새로운 예배의식도 생겼다. 유대교(유다이즘) 토대가 형성된 것이다. 모임장소를 시나고그(Synagogue)라 했다. 희랍어 시나게인(synagein 함께 모이다)에서 온 말이다. 신약성경은 회당이라 했다(마태 6,2). 유대인은 어디에 살든 회당 중심으로 뭉쳤고 교육장소로 발전시켰다.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지만 회당은 남아있었다. 축제 땐 성전에도 참여했고 회당에도 참석했다. 유대인 남자 10명 이상 되면 회당을 세울 수 있었다. 회당장(會堂長)은 권위를 가졌고 명예직이었다.

 

바빌론 유배는 기원전 538년 끝난다. 유대인은 몇 차례 나눠 바빌론을 떠났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못 떠나고 남은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a)다. 외국 거주 유대인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기원후 1세기 해외 거주 유대인은 대략 500만 명이었고 대부분 로마 제국 내에 살았다.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도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훨씬 많았다. 역사상 가장 큰 디아스포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였다. 기원전 1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인구 40%를 차지했다고 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배생활을 함께 했다. 그는 바빌론과의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던 지도자다. 하지만 항전파가 득세했고 결국 전쟁에선 패했다. 임금은 잡혀서 끌려갔고 에제키엘도 포로가 되었다. 유배지에선 희망을 심으려 애썼다. 포로생활은 결국 끝나며 주님과 새로운 계약이 맺어질 것이라 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도 예언했다.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을 철저히 무너뜨렸고 새롭게 일으켜 세운 체험이다.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마산 12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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