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예수님의 세례(Jesus lässt sich im Jordan taufen) 예수님이 자라셨던 나자렛에서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까지는 걸어서 보통 이틀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앞에 당도하기까지 먼 길을 걸으셔야 했던 것이지요. 이는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먼 길을 걸어 예리코 동쪽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 왔습니다(마르 1,5 참조). 거기서 요한이 했던 일은 새롭고도 특이해서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마태 3,1)라고 불렀습니다. 곧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면 요한은 그들을 물속에 잠기게 했습니다. 요한은 왜 떠돌지 않았는가? 요한은 왜 사람들을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오도록 했을까요? 예리코 시내를 벗어난 요르단강 바로 그 특정한 지점까지 말입니다. 그 역시 떠돌이 설교자처럼 이 마을 저 마을 옮겨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 그에게 와야 했지요. 정착해 사는 이라곤 아무도 없는 그 요르단 광야에까지 말입니다. 그러고는 물속에 잠겨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세례자 요한이 말했던 하느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마태 3,7 참조). 이 진노의 심판은 하느님 백성 위로 덮쳐오는 타오르는 불과 같았지요(마태 3,11-12 참조).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가오는 불의 심판을 면하려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불과는 상극인 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다시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아무 구속력도 없는 그저 좋은 의향만을 천명하거나, 이러저런 선한 결심들을 한가득 나열하는 일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 백성을 향해 그들이 근본에서부터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마태 3,10)고 말합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 3,12) 분이 이미 가까이 와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백성은 이제 자기 집을 떠나 요르단강까지 와야 합니다. 뿌리에 이르기까지 아주 깊이 근본적으로 삶을 바꾸는 일은 집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자신을 둘러싼 벽들이 매일 똑같고, 행동과 관습과 사람들이 매양 같습니다. 삶이 일정하게 틀에 박혀 있습니다. 옛것에서 탈출(exodus)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적어도 일정 시간만큼은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은 자신이 머무는 요르단 광야로 사람들을 오게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삶을 새롭게 바라볼 힘을 얻습니다. 집에서는 그런 일이 수천 배는 더 어렵지요. 오늘날 이와 비슷한 일이 피정에서도 일어납니다. 피정은 보통 자신이 사는 집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집을 벗어나 피정을 하는 장소로 떠납니다. 피정을 위해서는 다른 집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환경과 달라진 일상이 필요하지요.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새것이 옛것 속으로 밀고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옛것을 떠나는 일, 자신에게서 새것이 일어나도록 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왜 하필이면 요르단강에서? 요한의 세례는 요르단강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요르단강이었을까요? 깨끗한 강물이야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잠길 만큼 깊은 물도 겐네사렛 호수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왜 요르단강 특정한 장소에서 세례를 주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요한은 분명 수백 년 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르단강을 건너던(여호 1-4장 참조) 바로 그 장소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회개와 탈출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개와 탈출은 더 큰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을 의미했지요. 곧 요한의 확신에 따르면,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그릇된 안전판들을 내려놓고, 이제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그리하여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면, 그 옛날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던 일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금 새로이 당신 백성을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결정적인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나? 이스라엘의 수많은 이들이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고 집을 떠나 요르단 광야로 그를 찾아갑니다. 예수님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으십니다. 그분은 나자렛의 고향집을 떠나 요한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는 문턱 앞에 서신 것이지요. 하느님 백성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이 이처럼 거창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그분은 먼저 다른 이를 따르십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어드리십니다. 이 시작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큽니다(마태 11,11 참조). 예수님이 여전히 나자렛에 머무르셨다면, “나 스스로 나의 길을 결정하겠다.”고 선언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21세기 초 교회는 단독으로 투쟁하는 이들은 많지만 서로 함께 길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너무 적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를 어떻게 쇄신할지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이들은 늘 많지만 하느님께서 몸소 당신 백성을 어떻게 쇄신하려 하시는지에 대해 묻는 이들이 적어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미 초기 교회 공동체들은 예수님이 광야로 요한을 찾아가시어 다른 이들처럼 똑같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엄청난 곤란을 느꼈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 어떻게 그에게 가시어 그가 주도하는 쇄신 운동에 동참하신다는 말인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어떻게, 회개하겠다며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무리 한가운데 줄을 서신다는 말인가? 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받으신다는 말인가? 이 물음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작은 대화 하나를 집어넣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곧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신 것을 보고 처음에는 그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거절합니다(마태 3,14-15 참조). 루카 복음서의 세례 장면에는 이 대화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어떻게 세례를 받으실 수 있는가? 이전에 자주 듣던 대답은, 예수님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좀 안일한 대답이어서 핵심을 비껴갑니다. 예수님이 집과 고향을 떠나 세례자 요한에게 가셨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로 이 요한을 통해 행동하고 계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금 결정적인 국면에 진입하고 있었지요. 모든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마태 3,15 참조). 이것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이는 하느님 백성의 운명이 결정되는 바로 거기에 당신이 계셔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행동하시는 바로 그 장소에 계셔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고, 그리하여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은 계셔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당신을 죄인으로 느끼셨을까?”라는 도덕적 질문은 본래의 핵심을 비껴갑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바로 하느님의 이 계획에 당신을 전적으로 내어맡기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요르단강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이 말은 하늘과 땅이 다시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 온전히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로써 이제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는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모여 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은 열린 하늘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당 입구에서 왜 성수를? 우리는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성수를 바르며 기도를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당마다 문 앞에 성수대가 놓여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성당 입구에 놓인 이 물이 세례의 물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아주 매혹적인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들어설 때마다 늘 새롭게 우리가 받은 세례의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날 우리는 세례의 물을 통해 문턱을 넘어 구원의 땅, 하느님의 집인 교회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와 또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빛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례가 지닌 의미를 더욱 깊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곧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공식적인 일원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옛 인간을 뒤로하고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곳을 향해 길을 나선다는 뜻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약속의 땅이 보일 수 있게 드러나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러모으십니다. 세례는 바로 그곳으로 떠난다는 의미지요. 이 모든 의미를 깊이 생각할수록,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내 몸에 찍어 바른다는 것이 결코 그저 사소하고 평범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옛적에 요르단강을 건너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바를 우리의 현재 속으로 끌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곧 옛것에서의 탈출 감행, 진지한 회개의 마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쇄신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바로 그곳에 나도 함께하겠다는 굳센 의지가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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