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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관 복음서 입문] 1. 한 복음과 여러 복음서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홍세기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9 조회수748 추천수2 신고
1. 한 복음과 여러 복음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용어가 뜻하는 대로 구원의 기쁜 소식’,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선포를 뜻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복음에 관하여 이해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선포이다. 이러한 연유로 복음은 본디 책이 아니었다. 문학적 또는 역사적 작품이 아니었다.(150년쯤에 와서야 유스티노가 처음으로 복음이라는 낱말로 복음서를 가리키게 된다. , 우리말에는 복음복음서라는 용어가 따로 있지만, 그리스 말을 비롯한 서양 언어들에서는 한 용어가 이 둘을 다 가르킨다.)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네 책에 각각 복음이라는 제목이 달린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이야이에서도 그렇지만, 네 저자가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맺는 고유한 관계 안에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함을 뜻한다. 곧 서로 조금, 때로는 많이 다른 이 고유한 관계에 따라 네 개의 복음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정확성을 중시한다. 늘 확증되고 재확인되는 사실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복음서 문학은 조리가 없어 보여 당혹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복음서의 줄거리에 연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러한 모순들은 극복할 방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찾아내지 못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들이 복음과 관련된 더 고차원적인 문제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학 유형의 문제들로 이어진다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모든 글은 처음부터 일정한 문학 유형에 따라 쓰인다. 편지를 단편 소설처럼 쓰거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쓰지는 않는다. 글을 접하는 이도 문학 유형에 따라 그것을 이해한다. 광고 문구를 보면서 신문 기사처럼 읽거나 시를 과학 논문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문학 유형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형식과 어투, 논리와 목적을 지닌다.
 
  복음 역시 고유한 문학 유형을 이룬다. 복음서들을 편집한 이들은 책상에 앉아 완전한 목록을 갖춘 문헌들을 가지고 나자렛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분의 전 역사를 기록하려고 했던 저술가가 아니다.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했던 방식은 그러한 것과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사람들의 갖가지 병을 고쳐 주시며 여러 가지 뜻깉은 행동을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직접 예고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이제 열렬한 선포자가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언행을 새로운 마음’, 파스카 신앙으로 돌아보게 되고, 이 파스카 신앙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리고 각 교회 고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그분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약 사십 년 동안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여러 구전 전통이 형성된다. 설교와 전례와 교리 교수 등을 통하여, 이 전통들이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전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들 가운데 일부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글의 형태를 취하였을 수도 있다. 신앙 고백처럼 여러 어록, 그리고 틀림없이 매우 일찍부터 구조를 지녔을 일련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수난사 등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은 초기 공동체들의 생생한 삶 속에서 이미 여러 가지 형태를 갖춘 이러한 전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이 형태들은 기쁜 소식이 글로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 이미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골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키우고 신자들을 가르치며, 갖가지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고 전례에 생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새로운 숙고의 결과를 내놓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오류들을 바로잡으며, 때로는 적대자들의 반론에 대답함으로써 활기찬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고유한 관점에 따라서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작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한다. 그들 역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가르치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답을 제시하려고 애를 쓴다.
 
  각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관점은 나중에 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서 전통과 형성의 역사에 관한 작업들이 이루어진 뒤로 더 이상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중요한 사실 하나만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 특수한 세부 사항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초대 공동체들의 믿음과 삶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여러 실례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전하는 본문을 들 수 있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는 네 개가 있다(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코린토1). 이 넷은 결국 두 가지 원형으로 환원된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내려오는 것, 그리고 루카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에 전승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른 이 두 원형은, 저마다 전례에서 이용되면서 이미 고정된 전통적 양식을 그대로 글로 옮긴 본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오로는 자기도 이어받은 것을 전할 뿐이다. 복음서 저자들 역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그 세세한 사항까지 이야기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예컨대 기자처럼 최후의 만찬 장면을 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이미 성찬례에서 되풀이되는 스승님의 행동과 말씀에 이야기를 집중시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빵 또는 잔을 들고 찬미를 드리셨다는 양식, 곧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본문은 팔레스티나 당의 전례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감사를 드리셨다는(그리스 말로, 에루카리스테오) 양식, 곧 루카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의 말투는 헬레니즘 세계를 드러낸다.
 
  본디 한 전통에서 출발하였다가 두 갈래로 갈라진 다른 예를 주님의 기도’, ‘행복 선언같은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 받은 전통들의 성격,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의 특수한 생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복음의 전통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은, 왜 많은 구절이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정확한 짜임이나 순서 없이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씀 한 가지에만 집중된 작은 문학 단위로 나타나는지도 설명해 준다(소제목이 달린 복음서의 단락들이 대체로 상당히 짧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명확하지 않는 도입 문구들이 이러한 단락들을 드러내 보인다. 예컨대 그 무렵에”(직역은, “그 날들에”), “그 때에”, “그 뒤에”, 그리고 우리말에서는 통상 생략되는 그런데등이다. 이 이야기들은 본디 저마다 독립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의 복음서에서 보는 배치는 때로 복음서 저자들 자신이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세대들이 이러한 전통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기억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고정된 문학 형식을 갖추게 된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 틀을 이루면서 그 말씀을 특정 상황 속에 배치시키는 일화들, 적대자들과 벌어지는 논쟁 장면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거나 기적을 일으키시는 장면 등을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학 유형들은 저마다 특수한 구조를 지니는데, 그러한 구조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서 속에 글로 고정되기 전에 각 공동체에서 나름대로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이 전통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전통들은 어떤 식으로 믿어야 하는가? 실제로 예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요소들과 이 전통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에, 이 전통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증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알아본 분이다. 복음서의 이 증언들은 다른 이들도 바로 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복음서는 하나의 선포다. 그리고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루카도 포함하여, 복음서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쁜 소식의 증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이 전하는 것들의 (역사적) 실체에 복음서 자자들이 무관심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자구적 내용이나 그분께서 하신 행동의 정황과 세부 사항들을 정확히 재구성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해석을 거친, 곧 이미 하나의 해설인 전통을 전한다. 그래서 복음서 본문들은 세밀히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런 말씀들이나 저런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사명 수행 역사를 가리키는 확고한 준거점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준거점들은 설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복음서들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복음서 안에 흩어져 있는 많은 표지를 바탕으로 복음서 전통들을 거슬러 올라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둘째,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아람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복음서들은 그리스 말로 전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테면 번역문을 통해서만 예수님께서 하신 언행에 접근할 수가 있다. 번역문은 고대 전통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편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본디 아람 말로 이루어진 것들을 그리스 말로 옮겨 적은 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전승 현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면일 따름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국어로 말씀하셨음 직한 것들을 다시 구성해 볼 수도 있다. 또 그분께서 어떠한 비유를 드시거나 어떠한 병을 고쳐 주신 정확한 상황을 다시 구성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세부 사항에 들어가면 크든 작든 개연성을 띨 수밖에 없다. 역사적 확증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 한계는 복음서들의 성격 자체에서 나온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이 신앙은 중립적으로 진술될 수 없다. 생생한 증언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증언에는 증인이나 이야기하는 이들 자신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들이 여기저기에서 되풀이하고 조정하고 손을 댄 것들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의 기능과 그 효력은 여전히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예컨대 복음서와 역사서를 혼동하는 고지식한 이해를 뛰어넘어 신약 성경 자체의 전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연구를 깊이 해 나아가면서 설사 역사적 예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라는 물음은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복음서들을 잘 봉독하고 특히 복음서 본문들을 서로 비교해 가며 봉독하는 독자는, 결코 소득 없이 불확실성 안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예상하였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들은 저마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에 응답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지닌다. 이러한 요소들과 함께 복음서들은 독자에게,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확인하고 또 그것을 더욱 풍부히 하는 방도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의 예수님에게서 현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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