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노아 창세기의 원역사(原歷史), 창조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노아 이야기입니다(6,9-9,29). 이 노아 이야기의 대부분은 홍수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쓸어버리시기 위해 홍수를 일으키셨다.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동물들이 방주를 통해 구원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무지개를 표징으로 세우셨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하느님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개입과 활동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홍수를 일으키고 그치게 하고 정리하는 것도 다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분의 결정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역은 물이 풍성하지도 않고 큰 강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엎어버릴 정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홍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 지역(현재의 이라크)의 신화들(길가메쉬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에리두 창세기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이야기들까지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천명하려는 의도에서 그리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만나보고자 하는 이는 홍수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아입니다. 노아는 그가 태어날 때의 일화(창세 5,28)가 말하듯이, ‘위로, 위안’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세상의 타락에 대한 보고(6,1-7) 뒤에 노아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눈에 들었다.”(6,8) 노아가 무엇을 했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유로이 그를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뒤에 노아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나옵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6,9) ‘의롭다.’(차디크)라는 말은 ‘죄 없는, 정직한’이라는 기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 누구에게나 요구되던 덕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란 시시비비를 잘 가리는 사람이나 희생적인 사람,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등을 일컫지 않습니다. 성경의 ‘의인’이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죄를 피하고 선행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흠 없다.’는 것은 ‘완전한, 온전한’이란 뜻에서 나왔는데, 주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에게 자주 사용되던 말입니다. 이 말이 사람에게 해당될 때는 의로운 사람을 넘어서는 이들을 일컫습니다. 이는 몇몇 사람들만이 이룬 경지로,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이들, 그 법을 온 맘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라는 말은 정말 특별한 말입니다. 노아 이야기 앞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 목록에서 오로지 ‘에녹’만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창세 5,22.24). 우리말로 ‘살아갔다’라고 옮겨진 말은 본래 ‘걸어갔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일찍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이’, ‘하느님의 동행자’로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간 에녹과 같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는 일반적인 덕행에 모범적이었으며, 하느님 앞에 나서기에 합당했으며,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까지 받은 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아가 홍수 이야기 안에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방주를 만들라.’하시자 방주를 만듭니다. ‘방주에 들어가라.’하면 들어갑니다. 홍수가 일어난 다음에도 그는 방주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할 때 새들을 날려 세상을 살펴보지만,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을 보고 ‘물이 빠진 것을 알았지만’, 밖을 내다보고 땅이 말랐음을 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르지 않습니다(8,6-13). 주님께서 ‘방주에서 나와라.’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그 말씀에 따라 밖으로 나옵니다(8,18). 그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이며,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입니다. 노아는 또한 답답한 방주 안에서 일 년여의 시간(7,11 육백 살 되던 해 둘째 달 열 이렛날부터 8,13.14 육백 한 살이 되던 해 둘째 달 스무 이렛날까지)을 기다립니다. 아무런 말씀도 없고, 밖은 오로지 파멸의 물만이 가득한 세상, 그 한 가운데 흔들리는 방주 안에서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여러 신호들이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해도 그는 그 소리들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 자신을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만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들리자, 그대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모습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노아를 통해 깨우쳐줍니다. “사방이 어둠이요, 모두가 내게 대적하는 것 같은 상황, 아무도 답을 주지 않고 주님마저 안 계신 것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우리는 주님의 말씀만을 기다리는 사람, 주님의 뜻만을 따르는 신앙인의 자세를 지켜갈 수 있겠는가?” 노아의 모습은 이러한 질문에 답합니다. “그는 순종했고, 그는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구원을 얻었다.” 때로 나의 의지에 반하고 이해되지 않는 주님의 말씀과 그 뜻앞에 나는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위대함은 어떤 놀라운 일을 하거나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은 그 위대함을 이루는 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며 주님과 함께 걷는 이들이 바로 위대한 신앙인들입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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