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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불로 단련되는 황금처럼, 시험으로 단련되는 믿음으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9 조회수5,045 추천수1

[구약 성경 다시 읽기] 불로 단련되는 황금처럼, 시험으로 단련되는 믿음으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예? 이제 와서 뭐라고요? 내 손으로 자식을 죽일 뻔 했습니다. 하느님,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지난번에 우리는 원조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저버리고 불순종으로 응답한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셨지만 이후 인간의 죄는 더 깊어지고 커져만 갔습니다. 창세기의 기원사(1-11장)는 그 죄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형이 동생을 시기하여 쳐 죽이고(4,1-16: 카인과 아벨)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에게 폭력과 살육으로 철저히 앙갚음하고(4,23-24: 라멕의 노래) 하느님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6,1-5: 하느님의 아들들과 거인족) 등 인간의 죄가 세상에 차고 넘쳐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홍수로써 세상을 새로 창조하시고 새 계약을 세우셨지만(6,5-9,17) 인간은 원조가 저질렀던 불순종과 교만의 죄를 그대로 다시 이어갔습니다.(11,1-9: 바벨 탑) 이러한 죄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하느님께서 의인 한 사람, 구약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될 한 사람을 세우셨으니,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12,1-3)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

 

산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 대부분에서 행해지던 풍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몸 붙여 살았던 가나안 땅의 이방 민족들 역시 재난을 극복하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인신 제사를 올리곤 했는데(2열왕 3,26-27)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못된 악습을 좇아 그대로 행했습니다.(레위 20,3; 예레 32,32) 그러나 분명 하느님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히 금하셨습니다. : “그들은 바알의 산당들을 세우고 저희 자식들을 불에 살라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쳤는데, 이는 내가 명령한 적도 말한 적도 없으며, 내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이다.”(예레 19,5)

 

그런데 이토록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유독 구원사의 큰 획을 긋게 될 성조 아브라함에게는 참 모질게도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그 이유를 창세기 저자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분명히 밝혀두고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 하셨다.”(2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시험이 필요했는가?

 

하느님을 부정하고 우리의 신앙을 폄하하는 무신론자들이 종종 거론하는 것이 바로 이 아브라함의 시험 이야기입니다. ‘신이면 아비더러 자식을 죽이라 해도 돼? 너희의 하느님은 부모 마음 갖고 시험이나 하는 그런 하느님이야?’ 이런 사람들은 늘 그렇듯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저 공격할 이유와 근거만을 찾습니다. 정작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시험이 필요하지 않았던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지요.

 

우선 ‘시험하다’라는 말의 의미부터 알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22,1)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니싸(niss )’는 ‘시험하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훈련시키다, 경험을 통해 단련시키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속을 떠보거나 그의 믿음이 어떤지 간을 보려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불로 단련되는 황금처럼”(집회 2,5)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련하여 완성시키려 하셨던 것입니다. 완전한 믿음의 상징인 아브라함에게도 믿음의 단련이 필요했냐고요? 물론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처음에는 우리의 믿음처럼 약점 투성이였으니까요.

 

 

아들 바보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땅과 자손, 축복의 약속: 12,1-3)에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분연히 떨치고 길을 나섰던 일은 분명 성조사(창세 12-50장)의 결정적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삶은 사실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습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고서도 기근이 들자 이집트 땅으로 옮겨 갔고, 파라오가 두려워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12,10-19) 하느님의 ‘땅의 약속’을 오롯이 믿지 못했던 이런 모습은 ‘아들에 대한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지연되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불평했고(15,2-3), ‘대리모’ 하가르를 통해 인간적으로 후사를 꾀하기도 했습니다.(16,1-6)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비웃기까지 했지요.(17,17; 18,12-14) 일생을 통틀어 아브라함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좌절하고, 아들 때문에 환호했던 끔찍한 아들 바보, 그런 아브라함이 세상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새로 나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의 전부인 외아들을 되돌려 드리려 했을 때 그의 믿음은 불로 단련된 황금처럼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후 아브라함에게서는 이전과 같은 어떠한 불신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으로서 “믿는 사람의 조상”(로마 4,11)이 되었습니다.

 

 

시련으로 단련되지 않은 신앙, 모래 위에 지은 집(沙上樓閣)

 

시험 좋아하는 학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없으면 학생은 공부에 게을러지게 마련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실 속 화초 같은 믿음, 아무런 시련도, 단련도 겪지 않은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약하거나 오히려 아예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버릴 위험이 큽니다.

 

아브라함이 몸소 보여 주었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험과 시련은 ‘함정’도 아니고 그저 힘들게만 하는 ‘짐’도 아닙니다. 나약한 우리 믿음을 정화하고 단련시키셔서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자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진짜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걸까?’ 의심이 들고, 나약한 믿음에 스스로 실망하기도 하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나? 더 이상 어떻게 하라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그 순간은 결코 부끄럽고 죄스러운 순간이 아닙니다. 그때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입니다. 더 큰 믿음으로 도약하기 위한 은총이 가장 충만한 순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뿐인 위로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몸소 증명해 보여준 진리입니다.

 

병을 낫게 할 쓰디 쓴 약을 삼키지 못하고 자꾸 뱉어내기만 하는 갓난아이를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려 주시는 시험과 시련들, 참 쓰지만 꼭 삼켜 더 큰 믿음과 확신으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우리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받아들이셨던 그 길을 우리라고 어찌 그저 건너뛸 수 있을까요.

 

[월간빛, 2018년 3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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