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아브라함 (1) “가거라!” “그는 떠났다.”(창세 12,1.4)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모범, 아브라함, 그의 삶을 이 말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어법에 따르다 보니 ‘가거라.’, ‘떠났다.’라는 말이 문장의 끝머리에 오지만, 히브리말은 첫머리에 이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12,1) 모든 삶의 뿌리들을 떠나 미지의 땅, 아무런 근거도 없는 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아브람(17,5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뀝니다.)은 아무런 질문도, 어떠한 요구도 없이 그냥 길을 나섭니다. 자신 앞에 놓인 모든 불확실함이 주는 불안을 그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 극복하고 주저 없이 떠나갑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하느님께 대한 무한의 신뢰! 그것이 이제 그의 삶의 근거가 되고, 그의 뿌리가 되며, 그의 힘이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말년에 무덤으로 쓰일 땅 한 쪽을 제하고는 어떠한 땅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떠돌이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란에서 출발해, 스켐, 베텔, 네겝을 거쳐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소돔 옆을 지나 마므레, 브에르 세바, 헤브론까지 거치며 그는 여러 위기와 사건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그네살이’(12,10; 15,13; 17,8; 20,1; 21,23.34), 그의 여정에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 말입니다. 누구는 그의 이런 여정이 가나안 지역의 성소들을 방문하는 순례자의 길이라고 하지만, 그의 삶은 ‘떠돌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판 우물에 대해서도 값을 치러야 권리를 가질 수 있었고(21,25-34), 죽은 아내를 매장할 무덤자리를 사기 위해 지역 유지들 앞에 엎드려야 했습니다(23,1-20).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불러야 했었습니다(12,10-20; 20,1-18).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뿌리 없는 이, 지지하는 이 하나 없는 외톨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조카 롯을 구하러 달려갈 때는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 등장합니다(창세 14장). 다른 임금과 협상도 합니다(21,22-24).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느님께 매달리기도 하고(18,16-33), 황홀경에 빠지거나(15,12) 다른 이를 위해 대신 기도하는 모습(21,17)도 보입니다.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기도 합니다(12,7.8; 13.4.18). 사제, 예언자, 임금의 면면이 이 ‘떠돌이 유목민’의 모습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그가 세력이나 힘이 있다거나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는 삶의 순간순간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이 나그네-떠돌이를 믿음의 아버지가 되게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제후”(23,6)라는 칭호를 얻게 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삶은 불안한 삶이었습니다. 단순히 나그네살이 한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그에게는 늘 하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손에 대한 것입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해주겠다.’(12,2)로부터 시작해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들이 그의 여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지만 그에게는 자손이 없었습니다. 그의 자손 후보 1위였던 조카 롯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롯에 대한 이야기들(13장, 14장, 19장)은 롯이 분가해서 점차 다른 민족으로 분리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가르와 이스마엘(16장; 21,8-21)도 떨어져 나갑니다. 그의 종인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가 언급되는 대목에서 그의 불안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입니다. 당신께서 제게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 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15,2-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집트(12,10-20)와 아비멜렉의 궁(20,1-18)에서 겪는 위기들도 그의 자손과 관련된 일화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 자손에 대한 문제는 하느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점점 불가능해 보입니다. 자신은 백 살, 아내는 아흔 살이라는 고령이었기 때문입니다(17,17). 그럼에도 하느님은 계속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15,4),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17,19).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 나타나신 주님은 ‘내년 이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8,10)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는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사악’이라고 지어줍니다(21,2-3). 이로써 아브라함을 괴롭히던 문제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해결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불확실함과 불안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하느님께 묻고 청했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 매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고, 그의 자손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들과 대책들 모두가 부질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때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그대로 완성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후일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 말씀을 삶 속에서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찾기보다 인간적인 힘과 능력을 우선 찾지는 않는가 물어봅니다. 신앙의 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훈련의 길입니다. 오늘은 나의 불안과 불확실함 모두를 아브라함처럼 주님께 맡겨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아브라함 (2) 이사악 제사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연구들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시대(성경이 말하는 시대)가 실제 역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기원전 2,000년경을 배경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민족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들은 떠돌이 유목민들로 문서를 남기는 기록문화는 아직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갖고, 문화와 정치적인 발전을 이루고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왕조시대(기원전 1,000년 이후)에나 이루어집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살았다는 시대에 셈족(이스라엘은 셈족의 일부)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들을 향해 이동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야곱 등의 이름은 기원전 20세기만이 아니라 10세기에도 흔한 이름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부른다거나 하녀에게서 난 아들을 본부인의 아들로 삼는 풍습, 헤브론을 중심으로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도 기원전 10세기의 문서나 비문(碑文)에서 확인됩니다. 할례(창세 17장)나 자기민족의 배우자를 맞아들이는 이야기(창세 24장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가 강조되던 때는 유배와 그 이후시대(기원전 6세기)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배경에 대한 연구들이 아브라함의 역사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조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전설들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장소들, 특히 헤브론을 중심으로 전해져왔을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 전해오던 선조의 이야기들(전승)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어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실제로 일어난 일)을 꼬치꼬치 전해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은 누구신가?’ ‘그 하느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인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옛날이야기로, 때로는 노래나 시로, 어떤 곳에서는 법과 규정으로, 다른 데서는 신문기사와 같은 보도문 형태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 어떤 방식이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도 단순히 옛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화들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약속과 축복’이라는 주제를 반복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이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꼽으라면, 창세 22장의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자신의 아들을, 그것도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이자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을, 이복형인 이스마엘을 내보내면서까지 지켜낸 유일한 상속자를, 그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하느님은 누구신가?’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세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2.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대동하고 길을 나선다. 3.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제지하신다. 이 세 장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대답이 있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22,1.7.11 – 7절의 “얘야, 왜 그러느냐?”라고 번역된 말도 히브리말로는 같은 말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대답이 이 일화를 풀어내는 열쇠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 앞에서 그저 “예, 여기 있습니다.”라는 수긍의 말을 합니다. 그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말씀 앞에서 그는 단순하고 우직하게 응답할 뿐입니다. 이러한 순명의 자세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만든 이미지나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맞추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오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자유로이 주시듯이 또한 자유로이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왜?’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예’라는 대답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큰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사악을 데리고 길을 나설 때도, 산을 향해 사흘 길을 갈 때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는 것은 그의 아픔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약속으로, ‘전적인 하느님의 호의’로 얻은 아들에 대해 자신이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하느님의 권리 주장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희망이었고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12,1)이라는 과거를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택했듯이, 이제 그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미래마저 예상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로 들어섰듯이, 이제 미래마저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께만 온전히 의지하는 길로 더 깊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잔인한 신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께만 의지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 혈연이나 지연, 학연 그러한 것들을 쫓아 사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께만 의탁하는 삶, 하느님께 과거도 미래도 다 맡기는 삶으로 나아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을 보고 천사가 말합니다.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22,12)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서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뜻에 온전히 순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입니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