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부활의 알렐루야(österliche Halleluja) 교회 전례력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도 가장 빼어난 예술작품입니다. 전례력은 역사를 거치면서 발전했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엿새 동안의 일상적인 날들이 이어지고 나면, 그다음에 찬란한 주님의 날인 주일이 오는 구조가 매번 반복됩니다. 주일은 주간의 정점인 동시에 그다음 주간의 ‘첫날’이기도 합니다.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지요. 이처럼 주일은 주간의 날들을 가로지으며 명확한 구분을 만들어냅니다. 엿새가 지나면 마침내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며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막바지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삶의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례력도 주간처럼 보통의 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날들과 구분되면서 우리를 하느님 생각으로 드높여주는 날과 주간들이 자리합니다. 그러한 날과 주간들은 하느님 생각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이루신 구원의 업적들에 마음을 돌리게 합니다. 곧 전례력은 성탄, 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 날들은 유엔(UN)이 정한 날들과는 다릅니다. 유엔은 자주 어린이의 날, 습지대의 날과 같이 새로운 기념일을 제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례력의 대축일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하느님 몸소 그러한 날들의 설립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날들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기적들을 기억하게”(시편 111,4) 하십니다. 이러한 날들 가운데 가장 큰 축제일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40일 동안 회개의 시기를 보내며 준비를 하고 그 축제일이 50일 동안 이어지는 축일은 부활절 말고는 없습니다. 부활 성야처럼 그렇게 긴 전례를 거행하며 구원 역사 전체를 기억하는 축제일도 없습니다. 본래 이 부활 성야 전례는 온 밤을 지새우며 거행했는데 해가 뜨는 시각에야 끝마쳤습니다. 부활절만큼 알렐루야의 반향이 큰 축제일도 없습니다. 앞선 사순절 동안 알렐루야를 외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솟구치는 환희 이 알렐루야가 왜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이 알렐루야는 본래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물론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스라엘에게서 유래하지요. 알렐루야는 히브리말로 환호의 외침을 나타냅니다. ‘찬미하다’ ‘기쁨으로 환호하다’라는 뜻의 할랄(halál) 동사와 ‘야훼’(Jahwe)라는 명사가 결합되었지요. 알렐루야는 곧 ‘야훼 주님을 찬미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알렐루야라는 말을 번역해서 사용하면 더 의미 있고 좋은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게 번역해서 사용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말이 본래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번역이 좋은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묻고 나서 곧바로 다시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아니, 곧바로 다시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알렐루야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역하지 않은 채 알렐루야를 전례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말하자면 교회의 본래 의도입니다. 교회는 알렐루야를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인간의 개념과 진술과 정의를 훨씬 능가하는 말로 여깁니다. 알렐루야를 저마다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외치기 때문에, 이 외침은 마치 기쁨에 겨워 말을 더듬거리거나 무아경의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무아경의 상태에서는 할 말을 잃기 마련이지요. 물론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무아경의 외침은 동물의 포효와는 다릅니다. 무아경의 외침은 모든 개념 저편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외침은 모든 이해와 개념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밖으로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알렐루야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처럼 큰 기쁨과 환희는 내면 깊은 데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과 환희는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높이로 들어 올립니다. 부활절의 알렐루야는 하느님만이, 그리고 그분의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즉석 요리 식품에서 오지 여행 상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광고 산업의 선전 아래 잘 포장된 그럴싸한 품목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절의 기쁨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이 기쁨은 회사나 공장에 맡겨 제작할 수 없습니다. 선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기쁨은 사순절의 재계 동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걷고, 올리브 동산에서 그분과 함께 지새우며 간청의 기도를 드리고, 애틋한 마음으로 그분의 십자가 곁에 머무를 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아무 근거 없이 부활절의 기쁨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모든 설명과 논리를 뛰어넘습니다. 알렐루야가 지닌 환희에 대해 말한다면, 세상에는 그밖에도 좋든 나쁘든 수많은 종류의 무아경적 도취가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음악과 춤과 사랑의 도취가 있습니다. 환각과 만취와 전쟁과 살인에서 오는 도취도 있지요. 인간의 깊은 열망 가운데는 자신을 잊고 다른 이 또는 어떤 집단과 하나를 이루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것 속으로 자신도 섞여 들고 싶어 합니다. 수많은 예가 보여주듯이, 도취는 좋을 수도 있지만 위험한 경우도 많습니다. 파멸적이고 부패하며 비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과도하고 무의미한 무아경의 요소를 전례에 도입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 종교와 유사 종교들에서 그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로고스logos에 부합하는’ 예배, 곧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촉구합니다(로마 12,1 참조). 부활절의 알렐루야는 환희에 넘치면서도 이성에 맞갖은 기쁨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알렐루야가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본래 어디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는 본래 시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알렐루야가 특별한 의미를 차지하는 시편들을 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시편 113-118편이 그렇습니다. 유다인들은 이 시편들을 ‘파스카 할렐’ 또는 그저 단순히 ‘할렐’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이 시편들을 무엇보다 과월절의 만찬을 마무리하며 노래했지요. 예수님도 최후 만찬을 마치며 이 시편들을 제자들과 함께 부르셨습니다(마르 14,26 참조). 물론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과월절의 만찬이었습니다. 이 시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핵심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는 데 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사건이 그 핵심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부활 축제와 그대로 연결됩니다. 부활의 거룩한 밤에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겪은 이집트 탈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탈출exodus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부활 대축일 낮미사에서 우리는 온 교회와 함께 시편 118편을 노래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할렐’은 이 시편에서 정점에 도달하지요.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의 오른손이 드높이 들리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정녕 죽지 않고 살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에서) 유다인들의 예배에서는 시편 146-150편이 이른바 ‘작은 할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시편들은 시편 전체를 마무리하는 시편들로서, 이러한 마무리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거대한 교향곡의 피날레와도 같다고 할까요. 이 마지막 시편들은 “온 세상아,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천사와 세력들, 해와 별들, 불과 우박, 안개와 눈,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 총각들과 처녀들, 온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의 임금들과 모든 민족들도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그야말로 온 우주가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우주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느님 앞에서 원무를 춥니다. 또한 수금과 손북과 비파와 현악기와 피리와 자바라가 춤과 노래의 피날레에 반주를 합니다. 하지만 시편을 마무리하는 이 ‘할렐’은 피조물 전체를 아우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편들은 ‘종말’의 할렐입니다. 곧 끝없이 영원 속으로 울려 퍼지는 알렐루야입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노래인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먼저 구원의 업적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찬송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 구원자,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붙잡힌 이들을 풀어 주시고 주님께서는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시편 146,6-7.10) 하느님의 업적,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 백성과 온 피조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환희의 알렐루야를 노래하게 합니다. 때문에 알렐루야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기쁨과 환희의 외침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인간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당한 환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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