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여행] (95)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묵시 1,11)
박해에도 믿음 지킨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내린 소명은 환시를 기록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써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으로부터 옵니다. 다니엘서에서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과 비슷하게 묘사된 이 분은(다니 7,9; 10,6) 자신을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고 소개합니다.(묵시 1,18) 이런 표현은 사람의 아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소아시아 전체에 보낸 계시 요한 묵시록은 이 명령에 따라 환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요한 묵시록이 책에 명명된 이 일곱 도시에 보내진 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지방 전체에 있는 교회에, 곧 신앙인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숫자 7이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7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필요했던 시간으로 그 이후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전체 교회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앙인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짧은 형태이지만 편지의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묵시 23장) 그리고 각 교회에 보낸 내용은 시대 배경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공통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니콜라오스파’로 소개된 어떤 집단입니다.(묵시 2,6) 니콜라오스파의 기원이나 신원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당시 소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에 등장하는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묵시 2,2), “사탄의 무리”(묵시 2,9)나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묵시 2,14) 그리고 “이제벨이라는 여자”(묵시 2,20), “사탄의 깊은 비밀”(묵시 2,24)은 모두 니콜라오스파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보면 이들은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르게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황제 숭배 의식을 받아들이는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띤 집단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특징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발라암이나(민수 2224장) 이제벨(1열왕 16,31-34; 2열왕 9,30-34)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공통으로 사람의 아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소명 환시에서 표현된 내용을 통해 계시를 전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편지는 공통으로 승리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끝까지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끝맺습니다. 이 약속들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되는 종말 이후의 환시에서 다시 표현됩니다. 마치 일곱 교회에 약속했던 말씀이 종말과 함께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 약속의 실현 요한 묵시록은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환시를 통해 알려줍니다. 이것은 단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약속된 것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 묵시록 저자는 자신의 환시를 이미 사용된 구약성경의 표현들을 통해 설명하거나 묘사합니다. 개별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특히 종말과 관련된 예언서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고 그 개별적인 표현들이 모여 새로운 환시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들을 통해 종말에 대한 새로운 환시를 전하는 셈입니다. 학자들은 이런 특징을 ‘모자이크식 환시’나 ‘콜라주 방식의 환시’라고 부릅니다. 이런 특징에서 보면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2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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