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다시 읽기] 박수칠 때 떠나다, 모세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9-10) 오경(五經, Pentateuch)의 주인공, 모세 구약 성경의 첫 다섯 권(창세기~신명기)인 오경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 그 모두의 근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책들입니다. 여기에는 천지 창조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의 구원 역사가 담겨 있는데, 특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내시고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일(탈출 1-19장)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가장 의미있는 구원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천지 창조로부터 성조들의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그 장구한 세월이 창세기 한 권에 담겨 있는 반면,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의 단 40년간의 이야기가 탈출기부터 신명기까지 무려 네 권의 책(탈출 12,43-신명 34,12)에 소상히 담겨 있는 것만 봐도 분명합니다. 이 네 권의 책의 주인공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 진작부터 예비하신 사람, 모세 야곱이 온 가문을 이끌고 이집트 고센 지방에 정착한 지 430년이 지나, 이스라엘은 이제 장정만도 육십만 가량에 이르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탈출 12,37-40 참조)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하셨던 자손의 약속(창세 12,2; 15,5; 26,4; 28,14)이 인간의 그 숱한 의심과 죄의 역사를 넘어 얼마나 한결같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축복조차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던 파라오는 그들을 더 거세게 억압하며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 명했고, 그 덕에(?) 모세는 강가에 버려졌습니다. 분명 인간의 죄와 욕심으로 일어난 참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던 파라오도, 석 달된 피붙이를 강가에 버려야 했던 어머니도, 아기를 건져냈던 공주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 비극조차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말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에 들어간 이들로부터 네 번째 세대에 속하는데(레위.크핫.아므람.모세), 이는 과연 하느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가나안 땅]로 돌아오리라.”고 약속하셨던 말씀(창세 15,16) 그대로였습니다. 보장된 미래와 영화를 버리고 하느님의 백성 속으로 억압과 절망 속에서 노예로 살던 이들이 신념을 갖고 자유와 해방으로 나아갔던 탈출기 이야기는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희망 가득한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실제로 디즈니 만화 이집트 왕자(The Prince of Egypt, 1998)나 엑소더스(Exodus: Gods and Kings, 2014) 같은 유명한 영화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모세를 이집트 궁중에서 자라난 ‘왕자’로 그려냅니다. 성경은 모세의 이름을 ‘물에서 건져낸 이’(히브리어로 ‘모셰’)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지만(탈출 2,10) 사실 이 이름은 이집트 식으로 ‘아들’을 뜻하며 투트-모세(Tut-mose: 지혜의 신 토트의 아들)나 라-모세(Ra-mose: 태양신 라의 아들)처럼 이집트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분명 모세는 이집트 공주가 “자기 아들로 삼아”(2,10) 궁중에서 키운 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장된 미래와 영화를 누리는데 안주하지 않고, 억압받고 폭행당하는 하느님 백성에게로 향했습니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한”(민수 12,3) 모세가 강제 노역을 하는 동족을 학대하고 폭행하던 이집트인을 쳐 죽였던 일은(2,11-14) 그가 살인을 했다는 점보다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족에 대한 애정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의로운 심성은 피난길 중에 미디안 사제 르우엘의 딸들을 목자들의 패악질로부터 구해주었던 일(2,15ㄴ-17)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의로움과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던지고 하느님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걸 모르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겠지요. 기다림, 그리고 부르심 모세는 자유와 해방의 맛과 의미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면당했고(탈출 2,13-14; 사도 7,25 참조) 파라오까지 자신을 죽이려하자 멀리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피신 이야기(탈출 2,15ㄴ-4,18)는 하란으로 피신했던 야곱의 일화(창세 29-31장)를 떠올리게 합니다. 야곱이 그러했듯, 모세 역시 도피하여 객지에 몸붙여 살던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았고(3,1-4,17) 그분 구원의 도구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실 모세의 생애 전체가 오롯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궁중에서 보낸 40년(사도 7,23)은 파라오와 대등하게 맞서 싸우기 위한 이집트 궁중 학문과 지혜를 배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미디안 땅에서 목동으로 산 40년(사도 7,30)은 장차 척박한 광야에서 어리석은 백성을 지켜낼 목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두 번의 40년 후에야 비로소 모세는 이어지는 40년의 광야 여정 동안 그 죄 많고 고집 센 백성을 지키고 인도해 낼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일이, 그분 구원의 열매가 우리 안에 결실을 맺기까지는 우리가 반드시 참고 인내해야 할 시간들이 있습니다. 꼭 마음에 새겨야 할 사실입니다.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는 호렙 산 위 떨기나무의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린 겸손한 모세에게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는 사명과 함께 당신의 이름 “야훼(YHWH: 神名四文字)”를 처음으로 계시하셨습니다.(3,14-15) 야훼라는 이름은 ‘…이다.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하야 ’에서 온 것으로, ‘스스로 있는 자로서 모든 피조물을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이 이름(“있는 나”: 3,14)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시며 ‘몸소’ 그들을 구원의 땅으로 이끌어 가실지를 미리 예고하고 있습니다. 떨치고 일어나 자유와 생명의 길로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로 진작부터 준비시키신 모세였지만 그 역시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연이어 네 번이나 거부했으니까요.(탈출 3,11; 4,1.10.13) 겸손하지만 한편으로 겁 많고 소심했던 모세를 계속해서 달래시며 ‘내가 도와주마, 너와 함께하여주마!’ 설득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3,12; 4,2-9.11-12.14-17) 어찌 그리도 자상하신지 늘 흐뭇하고 감사한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사실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싸워 백성을 구하고 그들을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그 억척스런 사명 앞에서 모세가 어찌 쉽게 “예” 라고만 할 수 있었겠습니까만, 결국 그는 하느님의 도움과 현존의 약속을 믿고서 용기 있게 일어섭니다. 그렇게 자신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을 걷는 자, 자신을 살리기보다 하느님의 백성을 살리고자 나선 이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탈출기 저자는 완고한 파라오에게 주어진 열 가지 재앙을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신들을 굴복시키셨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일은 나일강의 신들인 크눔(Khnum)과 하피(Hapi)에 대한 승리를, 개구리들을 죽여 없애신 일은 개구리 머리를 가진 다산의 여신 헤켓(Heqet)에 대한 승리를, 이집트를 뒤덮었던 암흑은 이집트 최고신인 태양신 라(Ra)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열 번째 재앙, 곧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가 죽임을 당한 일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심을 만천하에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제야 파라오는 완전히 굴복하여 그날 밤으로 당장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 밤중에 있었던 일들, 곧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하느님의 백성임을 드러냄으로써 죽음을 넘겼던 일과 누룩으로 빵 반죽을 부풀게 할 틈도 없이 급하게 짐을 싸 이집트를 빠져나왔던 일이 장차 그 유명한 구약의 파스카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12장 참조)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구약의 파스카 축제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 무디어져 그저 하루하루 별 탈 없이 지나가는 것에 만족하기 쉬운 우리의 삶입니다. 궁중에서 그저 그렇게 유복한 삶을 누리며 편안히 살 수도 있었을 모세, ‘일상에의 안주’라는 가장 큰 유혹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길을 나섰던 그분이 우리를 그 광야 여정에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나태함도, 편안함에 대한 집착도 다 내려놓고 바로 지금 서둘러 모세를 따라 나선다면, 우리의 오늘 역시 ‘하느님과 함께 걷는 은총의 광야’가 될 것입니다. [월간빛, 2018년 5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경학 교수)] [구약 성경 다시 읽기] 박수칠 때 떠나다, 모세 (2) 주님의 종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신명 34,5-7 참조) 광야 여정, 하느님의 현존 이집트 제19왕조(기원전 1295~1186년)의 파라오 세티 2세 때에 작성된 한 문서(Papyrus Anastasi V)는 이집트에서 도주한 두 노예를 뒤쫓던 관리 이야기를 전합니다. 물론 이들을 모세와 아론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탈출 경로(라메세스-수콧-믹돌)가 탈출기와 민수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학자들은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충실하자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기둥 속에서,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직접 인도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생존의 위협과 척박한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도우심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렇게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가장 소중한 ‘구원의 기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갈대 바다의 승리, 하느님을 알게 됨 이집트 탈출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던 장엄한 ‘모세의 기적’ 이야기(탈출 14장)일 겁니다. 이 사건은 이집트에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던 일(12장) 이후,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건너감’(파스카[!])이었습니다. 혹여나 이 사건을 그저 ‘조수 간만의 차’나 ‘얕은 늪지대를 통과했던 일’로만 설명하곤 그것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라 여긴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저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던 음식들을 내놓고 나누도록 설득하셨던 하나의 ‘미담’(?)으로 의미를 축소해 버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갈대 바다 사건은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 구약 시대 최고의 구원 사건이요, 결정적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이집트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그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는 흔히 관계나 체험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탈출 1~14장에서만 무려 23회나 사용됩니다. 그렇게 탈출기 저자는 종살이에 익숙해져 하느님을 잊어가던 이스라엘과 그분을 전혀 몰랐던 이집트인들, 그들 모두가 ‘진정한 신은 오직 야훼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음을 힘주어 증언합니다.(6.7; 7,5; 10,2; 14,4.18) 일상 속에서 주어지는 소소한, 아니 어쩌면 결코 작지 않은 하느님 도우심의 기적들을 우리가 매순간 인지하고 감사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을 알아가는 길’, 가장 확실한 우리 ‘구원 체험’이 될 것입니다. 광야의 여정, 불평, 견책과 구원 탈출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전체 이야기는 하나의 완벽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백성으로 태어난 시나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두 ‘광야 여정’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의 광야 여정 중에 겪었던 시련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배고픔과 갈증(탈출 15,22-27; 16,1-36; 17,1-7; 민수 11,1-35), 공동체 내 권위에 대한 갈등과 마찰(민수 12,1-16; 16,1-35), 이민족의 공격(탈출 17,8-16)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광야 여정은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물론 ‘척박한 광야에서 고생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매일 불만을 쏟아내던 노예근성이 갑자기 어디 가겠어?’ 인간적으로 이해도 해보지만 그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기 시작한 것이 갈대 바다의 구원 사건 이후 고작 사흘이 지났을 때(탈출 15,22)라는 사실에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하느님을 곁에 모시고 살면서도 매일 불만을 쏟아내는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불평할 때 엎드려 그분께 간청했던 기도의 사람(탈출 15,25; 17,4.9; 민수 11,2.11-15; 12,13; 16,4; 20,6 참조), 모세입니다. 광야 여정 중에 모세의 겸손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가져왔고 죄 많은 백성을 광야에서 지켜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이 기본적인 ‘생존’과 연관된 것일 때에는(제1광야 여정 중) 그것이 설령 불평과 한탄일지라도 한결같이 구원으로 응답하셨지만 그 외에 더해진 탐욕과 갈망 때문일 때에는(제2광야 여정 중) 견책과 훈계를 위한 벌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라도(탈출 16장; 민수 11장), 마싸와 므리바의 물 이야기라도(탈출 17,1-7; 민수 20,2-13)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몰랐다 해도,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백성이 된 시나이 사건(탈출 19-24장)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역시 달라져야 했음을 말해줍니다. 분명 하느님은 우리의 부르짖음, 공허하고 서툰 탄식에조차 기꺼이 귀기울여주시는 분이시지만(탈출 2,23 참조) 하느님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매사에 불평만 해서는 안 됩니다. 불평불만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고, 의식 없이 빈말을, 또는 아예 상처가 되라고 형제에게 독한 말을 내뱉는 것에 익숙해진 이에게는 감사한 일상도 척박하고 힘든 광야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다, 모세 구약의 전승들은 모세의 겸손함(민수 12,3), 충실함과 온유함(집회 45,4)을 하나같이 칭송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경의 마지막에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12 참조)라는 최고의 찬사까지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40년간 광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마지막까지 인도해낸 후에 모세가 맞이하게 된 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이 아니라 그 행복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광야에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신명 34,4) 성경 저자는 그토록 거룩했던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지 못했던 이유를 두 가지 일로 설명합니다. 가나안 땅 정찰 후에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저버렸던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한 탓(민수 14,28-35; 신명 1,37)과 므리바에서 하느님의 말씀 그대로 실행하여 그분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탓(민수 20,12)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모세가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과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신명 34,7)는 구절에 좀 더 머물러보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기를 잃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생기를 잃고 죽을 때가 아니었는데도,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으로 떠났다.’는 말로 들려옵니다.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서 손만 내밀면 닿을 듯한 곳에 평생 동안 그토록 찾았던 목표가 있는데도, 모세는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지 않았습니다. 가지려 고집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즉시 내려놓고 그분께 모든 걸 맡겨드린 채 떠나는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안락한 삶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이집트의 왕궁을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 이제 평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그 축복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하느님께 생명을 돌려드리기까지 오롯이 순명했습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하느님 안에 자유로울까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짝사랑과 도우심을 가슴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의 시절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생활은 안정되고 몸은 편해졌지만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져갔던 그들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지친 나의 하루가 헛된 고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향한 ‘단련과 성장의 광야’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바로 그때 내 곁에서 오늘도 나를 지키며 함께 걷고 계신 광야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월간빛, 2018년 6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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