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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유일 섬김, 오직 한 분만을 섬겨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22 조회수3,493 추천수0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유일 섬김, 오직 한 분만을 섬겨라

 

 

저항 예언자들의 내면

 

지난 호에서 예언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믿음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하느님 신앙의 본질을 체험했고, 임금과는 갈등했다. 비록 임금과 예언자들은 하나의 하느님 백성에 속하고, 임금은 그 백성을 대표하는 자리지만, 예언자들은 다른 신에 마음을 뺏긴 임금과는 ‘믿음이 다르다.’고 공공연히 외쳤다.

 

이번 호에는 그런 예언자들의 주장을 깊이 들여다보겠다. 특히 그들이 외쳤던 ‘오직 하느님 한 분 만을 섬겨라.’는 주장의 의미와, 그 의미를 우리말로 잘 담을 수 있는 ‘유일 섬김’이라는 번역어를 성찰해 보겠다.

 

 

유일신론과 관련된 개인의 경험과 성찰

 

하느님 백성의 믿음은 유일신론(monotheism)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존재하시기에 다른 신을 좇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은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겨야 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유일신론이라는 말은 17세기에 처음 나왔지만, 하느님 백성의 믿음은 한결같이 유일신론에 기반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용어의 학문적 의미 등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예언자들의 주장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 소박하지만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개인의 경험과 작은 성찰을 나누고 싶다.

 

필자는 유일신론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현대인을 종종 본다.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도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는 논지에 대해 묻는 분도 있다. 현대 세계는 다양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는 이런 논지를 배타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유일신 증명’이나 ‘다른 신의 부재(不在) 증명’의 언어는, 삼위일체 교리의 언어만큼이나 어렵다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일부는 유일신론의 ‘지적 동의 여부’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교리 교육을 비롯한 신자 교육 시간에 영어의 ‘believe’와 ‘believe in’의 차이를 들어 믿음이란 단순히 지적 동의를 넘어서서 ‘믿음의 영역 안으로(in) 실존적으로 투신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이따금 접한다. 단순히 지적 동의만으로는 유일신론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고, 신앙적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그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만으로는 깨닫기 힘들고, 몸과 마음을 써서 총체적으로 투신할 때만 유일신론의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뜻이리라. 이런 의미를 구약 성경은 퍽 단순하고 소박한 방법으로 전해 준다.

 

 

고대 근동 문헌인 구약 성경

 

구약 성경에는 유일신론에 대해 명백하게 언급한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4,35). 이 말씀은 구세사의 목적이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는 유일신 신앙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이어지는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4,39)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신명기 연구의 대가인 브라울릭 신부는 이 두 구절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신 증언’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유일신 증언이 모세의 유언에 두 번이나 등장한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모세가 누구인가! 이집트 탈출의 주역이자 하느님과 백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가 아닌가!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 말씀이야말로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말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의 유언은 예언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 같다.

 

하지만 모세는 유일신을 선언할 뿐, ‘유일신 존재 증명’ 같은 난해한 논리는 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무척 단순하다. 그런 서양 철학의 복잡한 논지는 결국 플라톤에서 시작된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둔다. 플라톤은 기원전 5세기 인물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대략 기원전 13세기 무렵으로 잡는다면, 모세는 플라톤이 탄생하기 약 800년 전의 사람이다. 플라톤 철학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던 시대니 ‘플라톤적 논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기원전 332년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고 고대 근동에서는 헬레니즘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플라톤을 깊이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구약 성경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태어난 문헌이다. 구약 성경은 ‘정교한 그리스적 사고’로 저술된 문헌이 아니라, ‘셈족의 소박한 마음’이 서려 있는 글이다.

 

 

유일 섬김의 주장

 

구약 성경은 유일신론의 핵심 사상을 더 쉽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오직 한  분만을  섬겨라.’라는 유일 섬김(monolatry)의 주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장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낸 분은 엘리야 예언자이다.

 

북왕국의 임금 아합은 이원적(dualistic) 종교 정책을 폈다. 전쟁이 닥치면 하느님의 뜻을 물었지만, 풍요와 치유를 위해서 바알에도 문의했다. 그는 하느님 신앙과 바알 숭배를 기능화(functionalisation)시켜 두 종교의 공존을 모색했다. 다신교 신앙이었던 바알 숭배자들은 이런 임금에 협조했을 것이지만, 오직 한 분만 섬겨야 한다고 믿는 하느님 백성에게 이런 정책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지, ‘주님과 바알의 백성’이 아니었다.

 

아합 임금의 ‘주님과 함께 바알을 섬기자.’는 정책에 맞서 엘리야는 ‘오직 주님만 섬겨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옳은 믿음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도 플라톤보다 수백 년 앞선 인물이기에 유일신론의 논리적 입증 따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유일 섬김의 믿음을 하느님 백성 안에 확고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후대의 예언자들도 이 점에서 엘리야와 무척 비슷하다.

 

우리는 여기서 예언자들의 내면에서 종교 혼합 주의가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엘리야와 호세아, 미카, 아모스, 예레미야, 이사야 등은 하느님 신앙과 바알 숭배를 섞는 것을 신랄히 비판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다른 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다른 종교인과의 대화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초점은 단순했다. ‘지금 여기서 내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이집트 탈출의 주님만을 섬기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일신 경배(?)

 

엘리야부터 예언자들이 줄곧 강조한 유일 섬김은 ‘오직 한 분만(mono-) 섬긴다(-latry)’는 뜻이다. 이 말을 종교학이나 신학 사전 등에서 흔히 ‘일신 경배’ 또는 ‘일신 숭배’ 등으로 옮긴다. 널리 쓰이는 위키피디아 사전에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신 숭배(一神崇拜 · Monolatrism · Monolatry)는 다수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여러 신들 중 오직 특정한 신만이 숭배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 신만을 일관되게 숭배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신학자들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이런 설명으로 엘리야나 예언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여러 신 가운데 그저 하나의 신이 좋아서 그 신만을 숭배하는 것’은 엘리야의 마음이 아니다. 다른 신의 존재를 따지는 것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고, 지금 여기서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엘리야의 마음이다.

 

그저 하나의 신을 골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집트 탈출의 주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절박하고도 당연한 주장이 엘리야와 다른 예언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Monolatry’를 ‘일신 숭배’로 옮기는 번역에 한계를 느낀다. 이 말을 ‘유일 섬김’으로 옮겨야 그 신학적 내용을 더 충실히 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종

 

구약 성경에서 ‘섬기다’는 뜻에 가장 가까운 히브리어 동사를 꼽으라면 ‘아바드’일 것이다. 이 동사는 전례에 참여하는 상황도 의미한다. 아바드의 명사형은 ‘에베드’인데, 흔히 ‘종’으로 해석한다. 종은 ‘예속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주인과 가장 친밀하게 주인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만을 섬기는 사람, 유일 섬김의 사람은 주님의 충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창세기의 선조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때 스스로를 종으로 칭했다(32,11 등 참조). 모세도 스스로를 주님의 종으로 칭했으며(탈출 4,10 참조), 그 자신도 그렇게 불렸다(신명 34,5 참조). 한나(1사무 1,11 참조)와 사무엘(1사무 3,9 참조)과 다윗(1사무 23,10 참조), 그리고 솔로몬(1열왕 3,7 참조)과 다수의 예언자도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 일컬으며 기도하였다. 성모님께서도 이 유구한 전통을 이으셨다(루카 1,38.48 참조).

 

이분들 모두 유일신론의 논지를 입증하는 복잡한 논리를 펴는 데 마음을 쓰기보다, 몸과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만을 지극히 섬기며 사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인을 위한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의 약속은 낡은 약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째 약속이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초심을 담고 있는 귀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의 많은 표현이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더 핵심을 찌르며 현대인의 마음을 울릴 때가 많다.

 

우리는 ‘유일 섬김’에서 ‘유일신론’으로 발전하는 믿음의 큰 흐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유일신론이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 믿음의 핵심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제시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예언자들의 유일 섬김 주장은 지금도 실효성이 있다. 서양에서 발달한 고도의 철학적 논리를 어려워하는 현대인들이나 직관적이고 실천적 논리에 더 쉽게 공감하는 동양인들에게 유일 섬김의 주장은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난해한 논리를 잠시 미루어 두고 지금 여기서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외침에 귀를 기울이자. 얼마나 쉽고 호소력 있는가!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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