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노래들의 노래 (4)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감탄사만 연발하는 것 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과 거리가 먼 아가에서 1,2-2,7은 서문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을 시작할 때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잠깐씩 보여 주는 프롤로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은 둘밖에 없기 때문에 서문에서는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남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그 사이사이에 친구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그나마 알고 보면 친구들은 독립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기보다 남자 또는 여자가 하는 말을 여러 사람의 입으로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는 여자가 먼저 말을 시작하고 자기 연인을 임금님으로 묘사합니다. 이어서 여자의 친구들이 그 말을 반향합니다. 5-6절에서는 여자가 다시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묘사하고, 7절에서는 자기 연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연인이 어디 있는지 묻는 질문에 8절에서 남자의 친구들이 대답해 줍니다. 그다음에는 약간 뭉뚱그려 말한다면 1,9-2,3에서 남녀가 계속 번갈아 가며 화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둘이 만난 듯, 서로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2,4-7에서는 둘이 결합하고, 아가에서 여러 번 나타나면서 단락의 끝을 표시해 주는 2,7의 후렴구로 서문을 마칩니다(“예루살렘 아가씨들이어…”). 이번 달에 서문을 다 읽을 수는 없고, 여자가 처음 입을 여는 1,2-4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대단한 여자입니다. 이런 말로 책 한 권을 시작하다니요? 히브리어 문장을 한마디씩 번역하면 좀 더 심합니다. “그이 입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그다음에 나오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는 구절 역시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좀 더 직설적입니다.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추상명사가 아니라 ‘애무, 성적 유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고 말하는 8,6과 다른 단어입니다). 아가의 원문을 풀이하다 보면 그냥 번역된 본문을 읽을 때보다 아가가 훨씬 분명하게 남녀의 성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용감함 때문에 교부들과 중세의 신비가들이 놀랄 만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여자가 먼저 남자의 입맞춤을 그리워하는 말로 아가가 시작된다는 점은 파격입니다. 아가 전체를 놓고 각 절에서 누가 말을 하는지 계산해 봐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말합니다. 주인공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가의 저자가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가에서는 사랑을 묘사하는 데 여자의 시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에 대한 아가의 특별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그랬듯 구약 시대에 여자는 주로 사랑의 대상 또는 남자에게 성적 만족을 주는 배우자로 여겨졌지 사랑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가는 사랑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여자의 입에 담아 놓습니다. 여자가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합니다. 아니 사랑의 전문가는 여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가에서 여자의 역할은 단순히 남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더 주도적입니다. 이미 1,2에서 나타났듯이 여자가 먼저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나중에 합일에 이르러 여자가 자기 몸을 연인에게 줄 때에도 고전적인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처럼 출산을 위한다거나 가부장제에서 타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자신 안에 있는 사랑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아가에서 여자는 온통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와 같고, 아가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말하자면 사회 제도 때문에, 인습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여자의 속마음을 남김없이 해부해 놓은 것이 아가입니다. “나를 당신에게 끌어 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임금님이 나를 내전으로 데려다 주셨네”(1,4) 여기서도 먼저 시작하는 쪽이 여자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연인을 3인칭으로 지칭하여 ‘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남녀는 아직 떨어져 있습니다. 4절은 독백입니다. 아직 떨어져 있는 연인의 사랑을 여자가 갈망하는 것입니다. ‘임금님’이라는 호칭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가에서 주인공 남녀는 때로 임금님으로, 때로 목동으로 제시된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어떤 분이 여행을 갔다가 집에 기념으로 가져갈 물건을 사고서는 “영부인께 갖다 바쳐야지”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표현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아가의 주인공 남자는 임금이 아닙니다. 아가가 쓰인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임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목동도 아닐 것 같습니다. 목가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의 연애시에서 유행하던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임금님’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요?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근동 지방의 혼인 풍습인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혼인할 때 남녀가 임금과 왕비처럼 축제를 지냅니다.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여자는 손과 손톱 하나하나에 그림을 그리고 화려한 옷으로 계속 바꾸어 입더군요. 이런 맥락에서 연인을 임금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설명은, 어린 딸을 귀하게 여겨서 ‘우리 공주님’이라고 하는 것같이 연인을 귀하게 일컫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자기 연인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합니다. 실제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간다 해도 여자는 자기 연인만 쳐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인이 자기 ‘내전’으로, 즉 방으로 자기를 데리고 들어가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리리다”(1,4) 오해의 여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앞서 여자가 자기 연인의 사랑을 포도주에 비겼습니다(1,2 참조). 그런데 이제 또 누가, 더구나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사람이 그의 사랑을 노래하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아가에서 친구들의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1,4에서 등장하는 ‘우리’는 여자의 친구들로 여겨지는데, 그들은 연극에서 주인공의 말을 받아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다시 반복해 주는 합창단과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경쟁자가 아니고, 앞서 주인공이 했던 말이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연인은 정말 여자를 사랑에 빠지게 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그들이 당신을 사랑함은 당연하지요”(1,4)입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도 친구들의 말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에 주인공 여자가 응답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합창단이 자기 연인의 사랑을 기릴 때 여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질투가 없습니다. 친밀한 사랑은 분명 두 남녀만의 것이고, 친구들은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끝을 맺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2). 오늘날에도 이런 말을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는 사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차마 말하지 않는, 어쩌면 나 스스로 덮어버리고 보지 않던 내 내면을 파헤치기 때문입니다. ㅇ가의 주인공 여자의 적나라한 솔직함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랑에 눈을 감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살려고 하던 나를 뒤흔듭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살구씨는 얼었다가 터지면서 싹이 나온다고 합니다. 터질 듯이 내 안에서 밀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2년 4월호(통권 433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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