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노래들의 노래 (10) 그대는 닫혀진 정원(아가 4,12) 지난달에는 아가 4장에서 사용하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는 두 표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가에서는 이 단락에서만 여인을 ‘신부’라고 지칭하고, 이를 통해 주인공 남녀가 부부임을 알 수 있다고 했지요. ‘신부’는 전적인 자기 증여를 나타내는 명칭이고, ‘누이’는 사랑하는 이들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누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관한 노래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4,12-5,1 노래의 핵심은 ‘정원’이라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여성을 상징합니다. 생명이 싹트는 자리인 땅을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비유로, 성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3년 전, 처음으로 ‘나의’ 화분을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아가에서 말하는 ‘나의 정원’의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매일 출근하자마자 들여다보던 그 화분은 저의 소중한 분신이었습니다. 새 잎이 나면 제 안에서도 생명이 자라나는 것 같았고, 잎이 시들면 제가 병든 것 같았습니다. 아가 4장의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의 정원은 여인이 소유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담고 있는 그 여인 자신입니다. 내 정원, 그의 정원(4,16 참조) 그런데 이 노래에서 여인을 나타내는 ‘정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맥만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15절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정원’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그대는 닫혀진 정원”(4,12)이라는 표현처럼, 누구의 정원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그 정원을 일컬어 ‘내 정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부입니다. 그런데 같은 절에서, “나의 연인이 자기 정원으로 와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 정원’이 ‘그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 절에서 결정적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여인이 ‘내 정원’을 그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원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신부’라는 표현에 들어 있던, 전적인 자기증여라는 주제이지요. 탑과 방패로 무장한 요새였던 그 여인이, 바위틈의 비둘기였던 그 여인이 ‘나’를 ‘그의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5,1에서 신랑이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정원이라는 시적 비유로 이 단락에서 말하는 내용이 명백해졌지요. 신부가 신랑에게 자신을 주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 앞에는 신랑이 신부를 보고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4,1 참조)라고 말하는 ‘경탄’이 있었음을 기억하시지요?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여인은 자신을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단락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서 단계별로 나타나는 여러 상징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닫혀진 정원”(4,12) 먼저 12절에서 여인이 ‘닫혀진 정원’, ‘봉해진 우물’이라는 것은 처녀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아직 자신을 열어 주려 하지 않는 여인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정원은 봉인되어 밖에서 마음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연인은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2,14)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여인이 안에서 열어 주어야만 그 정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강제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여인이 스스로 사랑을 내줄 때에만 그 정원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의 여인은 분명히 쉽게 열어 주지 않습니다. 긴 여정을 거쳐 온 아가의 전반부 전체가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3-14절에서 언급되는 정원의 석류, 맛깔스러운 과일, 온갖 향료들은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그 감미로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떤 식물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석류(4,13)가 사랑, 생명, 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고, 나르드(4,13)는 1,12에서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 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 내가 줄 수 있는 향기롭고 고귀한 사랑,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나의 나르드입니다. 요한 12,3에서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부어 드린 장면이 생각나지요. 요한 복음서 저자는 분명 아가를 생각하면서 그 단락을 썼을 것입니다. 14절에 나오는 ‘몰약과 침향’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가지고 온 것이 몰약과 침향이었습니다(요한 19,39 참조). 그것은 방부 처리를 위하여 사용되는 재료입니다.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주는 사랑이 몰약이고 침향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죽음을 쳐 이긴다는 뜻입니다. 한편 사프란이나 육계향 같은 향료는 성경에도 드물게 언급되는 이국적 향초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귀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신랑은 경탄을 계속하며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단어 하나가 눈에 뜁니다. 13절에서 석류나무 ‘정원’이라고 번역된 단어인데, 히브리어에서는 페르시아어에서 빌어 온 외래어를 사용하여 pardes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pardes는 ‘정원’을 뜻하며 세 곳에서 사용되는데, 같은 어원의 그리스어 paradeisos는 대개 에덴 동산을 가리켜 사용되고 그래서 ‘낙원’을 뜻하기도 합니다(영어 paradise 참조). 사실은 에덴 ‘동산’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에덴 ‘정원’이지요. 아무튼 신랑에게 신부는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입니다. 주요한 점 한 가지! 맨 처음 입문에서 말씀드렸던 것인데, 아가는 창세 2장과 연결됩니다.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손상되기 전, 티 없는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가는 남녀의 순수한 사랑이 인간에게 원죄 이전의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일어라, 북새바람아!”(4,16) 이어서 16절에서는 신부가 자기 마음을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일어라, 북새바람아! 오너라, 마파람아! 불어라, 내 정원에, 온갖 향료들이 흘러내리게! 나의 연인이 자기 정원으로 와서 이 맛깔스러운 과일들을 따 먹을 수 있도록!”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부분에서 아가의 주인공이 이렇게 소심하게 보이지 않는데, 이 구절은 정말 여성스럽습니다. 제가 쓴 이 구절을 보고,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분들은 반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저릴 만큼 공감합니다. 아가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좀 있는데, 저는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 구절은 남성 저자가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놀라운 구절입니다. 온갖 감미로움을 자기 안에 지닌 이 여인은, 연인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자신의 사랑을 연인에게 전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정원은 일어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 나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연인은 자기 정원으로 옵니다.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5,1). 네가 바람결에 실어 보낸 너의 사랑을 나는 알아들었다.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제 그 정원이 주는 향기, 꿀, 포도주를 맛봅니다. “사랑에 취하여라”(5,1) 이것이 아가 전반부의 마지막 말입니다.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 남녀에게 아가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말했던 바와 같이, 그 사랑을 긍정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고 하신 구약성경의 인간관과 일치합니다. 정원에 있는 석류와 과일들(4,13)이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고 그 사랑의 즐거움이었다면, ‘먹어라’는 말은 그 사랑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정원에 온 신랑이 포도주와 젖을 마신다면(5,1), ‘마셔라’ 역시 한껏 그 사랑을 향유하라는 뜻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주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으라는 말입니다. 취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아가는 죄에 물들기 전 낙원에서 살던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다시 완성될 낙원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0월호(통권 439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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