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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15: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아가 7,13)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297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15)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아가 7,13)

 

 

어느새 다시 봄이 오고 있습니다. 들로 나가 밖에서 밤을 지내자고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계절입니다.

 

지난달에 읽은 것은 아가 7,2-11, 여인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연인이 자기 애인에게 “오, 사랑, 환희의 여인이여!”(7,7)라고 환성을 올렸을 때, ‘사랑’이라고 불렸던 그 여인은 자신이 ‘나의 연인에게 곧바로 흘러가는 포도주’이고 ‘내 연인의 것’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술이 익어가듯 사랑도 익어갑니다. 제가 썼던 표현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인 여인에게서, 그 ‘가능성’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온전히 연인에게 부어 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7,12-14에서는 사랑을 나누기 위해 들로 나가자고 연인을 부르고, 8,1-4에서는 어머니의 집에서 사랑이 완성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7,12)

 

“오셔요, 나의 연인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7,12)라고 말하는 이는 여인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였는지요!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2,14)라고 간절히 불러도 바위틈에 몸을 숨기려고만 하던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다시 한 번 상기할 점은,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연인의 ‘경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알았을 때에 그 귀한 자신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합니다.

 

여인은 들로 나가자고, 시골에서 밤을 지내자고 초대합니다(7,12 참조). 1,17에서 “우리 집 들보는 향백나무”라고 말했을 때나 2장에서 장마가 걷혔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던 때와 마찬가지로, 들과 시골은 인간의 간섭이 없는 자연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도시에는 야경꾼이 있었고(3,3; 5,7 참조) 오빠들도 여인을 가로막았습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사랑이 자연에 속한 것이라면, ‘들’은 그 사랑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더 살필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망울이 열렸는지 석류나무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7,13). 여기서 다시 절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포도나무 꽃이 핀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는 오빠들이 포도밭을 지키라고 시키고, 여동생은 “내 포도밭은 지키지도 못하였”(1,6)다고 말합니다. 그때의 포도밭은 처음에는 자연적 의미의 포도밭을 뜻했지만, 나중에는 여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은 지금 들판으로 나가자고 말하면서 포도나무 꽃을 이야기하지만, 그 꽃은 포도밭에 피는 꽃이면서 여인의 몸에 피는 꽃입니다. 사랑이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에 봄이 돌아오는 것은 여인에게도 사랑의 때가 오는 것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꽃이 피고 꽃망울이 열린다는 것은 여인이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신체적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전통적으로 사랑을 나타내고 여성을 나타내는 비유인 포도나무와 함께, 석류도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광고 문구에서 ‘미인은 석류를 좋아한다’고 했던가요?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석류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8,2에 가서도 여인은 “당신에게 … 나의 석류주를 대접하련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뜻이지요. “나는 … 포도주랍니다”(7,10)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포도나무 꽃이 핀다는 것이 신체의 성숙만을 가리킬까요? 몸만 자라면 사랑을 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인격의 성숙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표현이 있습니다. “… 우리 보아요”(7,13)입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이 혼자서 보고 판단할 수 있지 않기에 둘이 같이 보아야 합니다. 여인이 스스로 사랑의 때가 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내주겠다고 스스로 원하게 될 때에만 여인은 몸과 마음을 연인에게 줍니다. 사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자고 하는 여인은,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자신 안에서 사랑을 성숙시켜 왔습니다.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어요”(7,14).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줘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온 것이랍니다”(7,14). 순결을 말합니다. 여인의 몸이 포도나무라면, 지금까지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온갖 과일을 여인은 때가 될 때까지 간직해 두었습니다. 썩혀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간직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에게 온전히 주기 위해서입니다. 전적인 증여를 위해 보존된 사랑입니다.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8,1)

 

8장으로 넘어가면 배경이 바뀝니다. 들판에서 계속 살 수 없는 것이지요. 두 사람은 사회 안에서, 특히 가족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있습니다. 관습이 있습니다. 하물며 현대도 아닌 고대 사회에서 연인들이 길거리에서 입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 오라버니 같다면!”(8,1) 비현실적인 가정이지요. 남매같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갈망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드러내놓고 사랑을 보여 줄 수 없기에, 여인은 지금 이 말로써 자신의 속마음을 다 표현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구절은 어렵습니다. 일단 번역부터 쉽지 않습니다.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내 어머니’도 될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아예 “나를 낳으신 어머니”로 되어 있고, 대중 라틴 말 성경은 “당신이 나를 가르칠 텐데”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머니일 경우와 연인일 경우, 각각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그 장소가 “내 어머니의 집”(8,2)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남녀의 사랑이 들판에서 끝나지 않고 가족 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고 낳은 집입니다. 아가에는 누구의 아버지도 등장하지 않기에, 가족의 역사는 사랑하고 잉태하고 출산했던 어머니들을 통해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잉태하셨답니다”: 8,5). ‘어머니의 집’이 이러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는 사랑을 가르치는 어머니를 뜻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이어 가도록 어머니가 딸에게 가르치고, 자연에 속하는 사랑이 가족이라는 사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한편 ‘가르치다’의 주어가 연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이끌어 데려가고 당신은 나를 가르치련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사랑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여인은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 오라버니 같다면!”(8,1)이라는 전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같은 가족이 아니었던 남녀가 남매와 같이 가족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그들의 사랑은 완성되고, 여인은 “나의 석류주를”(8,2) 연인에게 줄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석류주”(8,2). 석류주를 주는 것일까요, 나를 주는 것일까요, 사랑을 주는 것일까요? 저는 제 머리로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호한 표현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작게나마 경험해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뭔가를 줄 때, 사물인 석류주를 주고 있다 해도 실제로 주는 것은 ‘나’이고 ‘사랑’입니다. 그 석류주의 가치가 석류 몇 개의 값어치는 아닙니다. 석류주를 한 잔 가득 부어 연인에게 주는 여인은 이미 자신을 그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8,4). 자연스럽게, 가장 자연스럽게. 사랑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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