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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16: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4,069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16)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걱정입니다. 아가 8,6-7만 해도 이번 달 분량이 넘칠 것 같습니다. 그 두 절만 얘기하려 해도 빠른 템포로 글을 써야겠습니다. 거두절미. 사랑과 죽음의 싸움입니다.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8,6)

 

선물을 받으면 대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쓰도록 내놓게 되고,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럴 수 없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신학생들이 제 도장을 새겨 준 것입니다.

 

도장은 오직 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 사람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에스 3,10에는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인장 반지를 손에서 빼어 하만에게 주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임금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는 문서를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만은 임금의 인장을 받아 임금 대신 법적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어떤 문서에 제 도장을 찍으면 보는 사람은 분명 제가 확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장은 그 사람을 대변합니다. 제가 죽고 나면 제 도장은 쓰레기가 됩니다.

 

그만큼 도장은 그 주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인장처럼 나를”(8,6)이라는 표현으로 ‘나’는 연인의 인장이 됩니다. 연인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나에게 그의 이름이, 곧 그가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연인은 나를 절대로 떼어 놓을 수 없게 됩니다. 고대에 인장은 목에 걸거나 손목 또는 손가락에 끼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가에서도 가슴에, 팔에 나를 꼭 매어 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나와 결합된 그 사랑이 죽음에서 연인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8,6)이라고 말할 때, 아가는 아직 사랑과 죽음 가운데 어느 편이 더 강한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저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나 정열도(‘질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정열을 품지 않으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죽음 같은 사랑에 휩싸이게 될 때 나를 지켜줄 뭔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장’이라고 일컬어진 애인입니다. 결국, 참 모순되지요. 사랑이 나를 위협할 때 나를 지켜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에 따르는 위험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길”(8,6)

 

아가 번역에서 대단히 문제가 되는 단어가 8,6에 들어 있습니다. 아가에는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든 책 전체의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체의 해석을 좌우합니다.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다음에, 우리말 번역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라고 번역된 구절이 히브리어에서는 한 토막입니다. ‘불길’이라는 단어 뒤에 ‘야’가 붙어 있습니다. 칠십인역에는 “그의 불꽃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번역해 본다면, 여기서 사용된 ‘야’는 ‘할렐루야’의 ‘야’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야의 불길’이 되지요.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여기에서부터 설명할 수 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불’ 또는 ‘주님의 불’이 강한 불을 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열왕 18,38 등 참조).

 

이 표현을 ‘야의 불길’이나 ‘주님의 불길’로 번역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격렬한 불길’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아가의 나머지 부분 전체에서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이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서 사랑을 ‘야의 불길’이라고 선언하면, 이 구절은 아가 전체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랑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것, 강제로 명령할 수도 없고 억지로 금지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철새들이 돌아오는 것과 같이, 사랑은 자연이었습니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2,7; 3,5; 8,4)라는 후렴구는 오히려 인간이 그 사랑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설령 “사랑은 야의 불꽃”이라는 번역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사랑이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창세 1,27)하시고 보시니 좋다고 여기신 하느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사랑의 근원에 계십니다. 그리고 아가는 바로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책입니다. 맨 처음에 아가의 해석사를 요약하면서, 자구적 의미를 받아들여 아가가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때, 어떤 이들은 아가가 성경에 속하기에 부당한 책이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가에서 노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랑이고, 그 사랑을 티 없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창세 3장에서 비로소 도입되는 죄의 역사보다 더 강하고 근본적인, 창세 1-2장에 기술된 창조의 선성(善性)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8,7)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죽음처럼 저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을 이깁니다. ‘물’은 생명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상징입니다. 물은 생명이 시작되는 원천이면서 많은 생명을 죽게 만들 수 있으며 어둠의 심연이기도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기쁨과 생명으로 한 사람을 가득 채우지만,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완전히 내어 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에게 죽음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있게 되면 그 사랑의 힘은 나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나는 성벽”(8,10)

 

중요한 한 가지 주제가 아직 남았습니다. 여동생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오빠들은 동생이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막으려 합니다. 동생에게 울타리를 치고 널빤지로 가로막으려고 합니다(8,9 참조). 그러나 동생은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성벽, 내 가슴은 탑과 같아요”(8,10). 여기서 말하는 성벽과 탑은 방어 시설입니다. 아무에게나 쉽게 자신을 내주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식입니다.

 

그러나 공격해 오는 모든 이를 막아 내는 성벽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정복됩니다. “하지만 그이 앞에서는 화평을 청하는 여자랍니다”(8,10). “화평을 청하는 여자”라는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찾는 여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정복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벽과 같이 굳건했으나, 진정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해 준 연인에게는 성문을 열어 줍니다(“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 2,4).

 

“화평을 청하는 여자”, ‘평화를 찾는 여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달에 더 깊이 있게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더 짚어 둘 것은, 8,11-12에 나오는 솔로몬처럼 돈으로 사랑을 사려는 사람에게 여인은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는 여인의 자존심이 너무 강합니다.

 

아가 본문에 대해서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두 달은 아가에 관해 제가 썼던 편지 두 편을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을 마치면서 마침표 하나를 찍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게 될까요? 전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불사불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은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랑을 하면 죽을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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