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7)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직역: 로마 8,26). 문맥 보기 성령의 모든 활동은 우리를 성부와 성자께 길들이는 데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부의 영을 부어 주시고 우리는 그 영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8,15)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 자녀’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완성시키는 성령(8,14-17 참조)은 현재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북돋운다(8,18-25 참조). 바오로는 8,26-27에서 독자의 현재 체험에 집중하면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돕는지 더욱 구체화한다. 이 두 구절에는 성령과 기도의 관계에 토대를 둔 바오로의 기도 신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달에는 8,26을 해설하고 다음 달에 8,27을 해설하겠다. 우리의 짐을 함께 지고 가시는 성령 우리말로 ‘돕다’라고 번역된 ‘쉰안티람바노마이(συναντιλαμβάνομαι)’를 직역하면 ‘옆에서 함께 짐을 짊어지다’는 뜻이다. 성령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옆에 다가와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짐을 함께 들어줄게, 목적지까지 함께 가자!” 하고 말하는 친구이다. 이 동사에는 다른 사람의 일을 거든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실제로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실제 목표한 것에 대해 어떤 결과를 달성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동사로 표현되는 성령의 생생한 도움은 8,26에서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테 아스테네이아 헤몬 τῇ ἀσθενείᾳ ἡμῶν)’, ‘올바른 방식으로(카토 데이 καθὸ δεῖ)’,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στεναγμοῖϛ ἀλαλήτοις)’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나약함 26절에서 ‘나약함(아스테네이아 ἀσθενεία)’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째, 인간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육에 따른 일반적 나약함으로 해석한다. 나약함은 육을 지니고 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단지 성령의 힘, 하느님의 사랑이 이 고통에서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나약할 때’ 성령이 도우신다는 것을 바오로는 체험했다(2코린 13,3-4 참조). 바오로는 서간 여러 곳에서 자신의 나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자랑한다고 고백한다(2코린 11,30; 12,9 참조). 이런 의미에서 ‘나약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과 연결되는데,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생명의 샘으로 계시된다. 나약함에 대한 바오로의 개념은 그리스도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나약함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라는 특별한 영역에서 겪는 한계다. 그것을 나약함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 의미가 26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접속사 ‘왜냐하면(가르 γάρ)’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이라는 관점에서 나약함의 체험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독자가 현재 겪는 체험에 집중하면서 성령이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 우리말 본문에서 ‘올바른 방식으로’라는 그리스어(카토 데이 καθὸ δεῖ) 표현은 ‘그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를 의미한다. 곧 ‘기도의 목적인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게’라는 어감을 가지고 있다. 기도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뜻에 복종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바오로는 이 ‘올바른 방식’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이 기도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돕는지 소개한다. 성령의 도움은 우리가 해결하기를 바라는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 구체적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자녀로서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자세를 형성시키며, 하느님 아들의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그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믿도록 그들을 인도한다. 8,26.28에서 바오로는 동사 ‘(우리는) 알고 있다(오이다멘 οἴδαμεν)’를 믿는 이들의 공통 체험과 관련지어 두 번 사용한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른다(8,26 참조). 그러나 우리는 기도 안에서 희망을 간직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8,28-30 참조). 몸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바오로는 26절 후반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στεναγμοῖς ἀλαλήτοις)’를 통해 26절 전반부에 나온 기도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을 도우러 오시는 성령의 다른 면을 설명한다. 형용사 ‘말로 표현할 수 없는(알랄레토스 ἀλάλητος)’은 신약성경에 한 번 나온다. ‘너무 강한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성령을 주어로 하는 26절의 ‘탄식(스테나그모스 στεναγμός)’은 8,22의 피조물의 탄식과 8,23의 성령을 첫 선물로 받는 ‘우리 자신’의 탄식과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한숨이나 탄식’이 아니라 성령의 진정한 기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칠십인역(LXX)에서도 종종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인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탄식과 기도를 자주 연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24; 참조 6,5). 성경의 전통에서 인간의 탄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기억하시게 하는 도구가 된다. 위에서 말한 논거를 토대로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이 ‘신령한 언어’에 대한 구체적 암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오늘날 많은 성경학자도 이 표현을 신령한 언어로 제한하기보다 ‘성경의 기도’로 해석하는 데 더 비중을 둔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바오로는 명백하게 신령한 언어는 ‘말해지는 언어, 사실상 천상의 언어’라고 말한다(1코린 14장 참조). 이는 26절에서 성령의 탄식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령이 ‘탄식한다’고 말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의 탄식이 들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26절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글자의 의미 그대로가 아니라 은유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이 표현의 핵심은, 믿는 이들의 갈망이 너무나 커서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데 있다. 곧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인간의 나약함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성령은 인간의 나약함의 뿌리에서 일을 한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8,26에서 효과적인 기도로 나타나는데, 성령은 이 탄식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성령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은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한 성령의 중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위해 중재하나, 우리는 그분이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를 돕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성령의 탄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만 성령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을 이해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재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기도가 단지 인간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인간의 나약함 한가운데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중재 기도는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분이 거기에서 인간에게 당신을 창조주이자 구원자로 드러내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나약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거기에 참여하고 그것을 짊어지시는 하느님의 탄식이다”(H. 쉴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우리 위에서 탄식한다. 그렇게 그분의 영을 통해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시고 당신의 피조물이 필요한 것을 채우러 오신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임숙희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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