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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7: 4세기 서방 교회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였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942 추천수0

성경과 영성 (7) 4세기 서방 교회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였을까?

 

 

한국 가톨릭 교회는 서방 전례에 속할까? 동방 전례에 속할까? 우리나라가 위치한 곳은 동양의 끝자락이지만, 가톨릭 전례만큼은 ‘서방 라틴 전례’에 속한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1054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서로 상대방에게 파문 칙령을 선포하면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결별 전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면서 초세기 중반에 이미 로마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했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잇따른 선교 활동과 순교로 인하여 교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초세기 중후반부터 로마 황제가 박해하기 시작하여 한동안 지하 교회의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황제가 반포한 종교 자유에 관한 ‘밀라노 칙령’(313년)과 로마 제국 국교에 관한 ‘황제 칙령’(392년)을 발판으로 성장하며 발전할 기회를 얻는 듯하였다. 하지만 330년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로마 제국이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면서 교회에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방 라틴 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는 언어, 전례, 신학이 분리되어 각자의 특성을 만들며 따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로마 제국의 빈자리를 대신하면서 유럽 지역을 이끌어야 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 교회로부터 신학과 영성에 대한 도움을 받으면서도 독자성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양 교회는 모두 신학과 영성을 펼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중심을 두었으나, 서방 교회는 실질적이고 실용적 관점을 신학을 전개한 반면 동방 교회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동서방 교회를 두루 섭렵했고 가교 역할을 한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4세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에서는 유럽 본토를 중심으로 굵직한 신학자들이 출현하여 활동하면서, 동방 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바탕으로 서방 교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신학과 영성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먼저 동서방 교회를 두루 섭렵하고 가교 역할을 했던 프랑스 출신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315-367/68년)를 들 수 있다.

 

세례를 받기 전의 힐라리우스는 고대의 다른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을 탐구하면서 절대자인 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성경을 접하게 된 힐라리우스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힐라리우스는 이런 자신의 회심 과정을 영적 발전의 여정으로 기억하였다.

 

성경에 깊은 감명을 받은 힐라리우스는 성경 주석에 관심을 갖고 공을 들여 저술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성경 주석에 대한 초기 작품인 <마태오 복음 주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나타난 주제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였다. 먼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 뒤, 교회 전체의 지평 아래에서 각자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영성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하여 그의 성경 주석 방법은 동시대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다.

 

동방 교회 지역으로 유배되었던 힐라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성경 연구 방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힐라리우스는 유배 후에 저술한 <시편 주해>에서 예형론적 관점으로 시편을 해석하였다. 즉 시편의 내용은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함께 읽어야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였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방법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할라리우스는 시편에만 국한하지 않고 또 다른 작품인 <신비에 관하여>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예형론으로 소개하였다. 또 그는 말년에 프랑스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권장하면서 영성가의 면모를 보이는 등 영성 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드러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주석한 암브로시우스

 

다음으로 동시대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약한 암브로시우스(337/9-397년)를 살펴보자. 귀족 가문 출신인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상류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황제의 행정관으로 봉직하다가 갑작스럽게 밀라노 교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동방 교회의 신학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받아들였으며, 훗날 자신의 작품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동방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우선 암브로시우스는 성경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는 당시 수도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성경 독서법(소리 내어 읽기)을 사용하지 않고 속독법을 사용하였으며, 사사받은 성경과 신학 교육을 묵상과 기도로 심화하면서 미래의 사목 활동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이 노력이 바탕이 되어 성경 묵상을 토대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강론을 할 수 있었다.

 

암브로시우스의 구약성경 해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필론과 그리스도교인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 방법에 심취하여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 · 윤리적 · 영적 의미를 이야기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전통 신학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곤 하였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조화를 위해 우의적이고 예형론적 해석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당시 교회에 잘못된 관점이 많이 나돌고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조화로운 일치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사람들이 쉽고 알맞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소개하였다.

 

반면에 암브로시우스는 신약성경을 많이 주석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 인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성에 더 가깝게 문자적 의미를 통해 신약성경을 주석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으로 다룬 신약성경 주해서인 <루카 복음 해설>에서 그는 풍부한 영적 감수성을 보이면서 여성과 가난한 사람 등 루카 복음의 대표 주제들을 주석하였다.

 

훗날 그리스도교인의 여성 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암브로시우스는 <직무론>에서 성직자뿐 아니라 일반 신자를 위한 영성 생활의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여성 신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동정녀>를 통해 여성 수도자의 삶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잊지 않았다.

 

 

동서방 교회의 신학 및 유다이즘과 서방 신학을 연결시킨 히에로니무스

 

마지막으로 ‘예로니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오늘날 슬로베니아 국경 지역 출신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347/48-419/20년)에 대해 살펴보자. 히에로니무스는 <이사야 주해>에서 성경에 관한 명언을 남겼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가 성경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점은 성경의 라틴어 역본(불가타)을 출판한 것이다. 그는 번역 작업을 계기로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을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과 라삐들의 주석을 통해 유다이즘과 서방 신학의 만남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성인이 되어 수도 생활을 동경하였던 히에로니무스는 수도 생활을 본격적으로 체험하고자 동방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문자적 의미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 예형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성경 주석 방법론을 접하였다. 결국 안티오키아 학파의 방법론에 더 기울었던 그는 오리게네스의 방법론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오리게네스의 저서에 많이 의지하면서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런 까닭에 히에로니무스는 구약성경을 주해할 때 히브리어 본문을 번역한 다음 자구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함께 살펴보았다.

 

평생을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과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던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자도 성경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면서 성경 독서를 자신의 정화 수단으로 제시하였다. 다만 안티오키아 학파가 영성 생활을 깊게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를 보여 주었던 것처럼, 역사적 · 문자적 의미를 탐구하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상대적으로 히에로니무스는 후덕한 모습보다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늘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였다.

 

고대 교부들의 신학 활동은 사실상 성경 연구로 집중되었다. 중요한 신학 주제의 논쟁에서도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 하였다. 그만큼 성경 주석은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신학 작업이었다.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멀리 위치했던 동방 교회가 먼저 신학 논쟁과 성경 연구의 중심이 되었지만, 4세기 종교의 자유 이후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성경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서방 교회는 성경 연구에 대한 동방 교회의 유산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미 라틴어가 자리를 잡은 서방 교회에서도 서서히 독자적 관점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개인의 영성 생활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사목적 배려도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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