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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12: 중세 초기 수도자들은 시편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922 추천수0

성경과 영성 (12) 중세 초기 수도자들은 시편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公的)이며 공통적인 기도는 무엇일까? 정답은 ‘성무일도(聖務日禱, Divine Office)’이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성무일도는 성직자가 의무로 바쳐야 하는 기도일 뿐 아니라, 수도자도 수도회의 회원에 따라 바치는 기도이며, 일반 신자에게도 권유되는 기도이다. 성무일도의 기도문은 주로 시편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실 하느님 백성이 기도로 시편을 낭송한 것은 무척 오래된 전통이다.

 

구약성경에서 시편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훌륭한 노래요 기도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시편은 하느님을 향한 예배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시편을 제외하고서 자신들의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시편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훌륭한 척도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하여 발현하신 예수님의 입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님의 가르침을 깨우치기 위하여 시편까지 받아들여 읽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소개하였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루카 24,44).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를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시편을 인용하고 활용한 찬미의 기도를 몇 편 소개하였다.

 

일찍이 동방 교회에서도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수도자들에게 시편 기도문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권고하였다. 지난 호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에서도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에게 다만 몇 편이라도 시편의 내용을 암기하라고 지도하였다. 이 전통이 서방 교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방 교회으 베네딕도 성인은 기도하는 데 시편을 적극 사용하라고 권하였다. 그는 《수도 규칙》에서 성무일도를 할 때 구약과 신약의 성경 독서와 함께 시간경마다 시편을 여섯 편이나 세 편 정도 바치라고 규정하였다(《수도 규칙》 9-17장 참조). 또 요일별 시간경에 따라 외워야 할 시편의 순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수도 규칙》 18장 참조).

 

베네딕도 성인은 시편을 기도로 바쳐야 하는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수도 규칙》 19,6-7). 기도를 바칠 때 외워야 할 시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자는 따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야간 기도’ 후에 남은 시간은, 시편이나 독서를 더 익혀야 할 형제들이 공부하는 데 쓰도록 할 것이다”(《수도 규칙》 8,3).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신앙생활

 

고대 말과 중세 초, 그리스도교가 북유럽에 복음을 전할 때 만난 민족은 켈트족과 게르만족이었다. 켈트족은 기원전부터 고대까지 유럽 본토에 거주하다가 고대 말에는 점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를 이어 발트 해 연안 북유럽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이 고대 말에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였다. 고대의 부족이나 민족은 대개 토속적 민간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두 민족에게도 민간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켈트족 사회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게르만족 사회는 무사를 중심으로 한 호전적 분위기가 많이 반영되었다. 그런 까닭에 켈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은 토속 종교에 담긴 종교적 열성을 발휘하여 개인마다 헌신하며 그리스도교를 실천하였다. 반면에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은 토속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집단 의식(儀式)을 통해 혼합주의 형태로 신앙을 표현하였다.

 

켈트족 지역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 덕분에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종교에 대한 민족적 열정에 힘입어 그리스도교 수도자로 사는 데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고유 언어가 있어 라틴어를 몰랐던 수도자들은 먼저 성경을 읽기 위해 라틴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런 다음 영성 생활에 전념하기 위하여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읽고 묵상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열정적인 켈트족 수도자들은 완덕에 더 나아가기 위하여 매일 두 팔을 수평으로 펼쳐 들고 시편을 전부 암송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시편은 그들의 기도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그들은 성경을 주석하는 작업에도 많은 공을 들여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 형성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멜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심을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그들 관습의 영향으로 참회와 고해를 개인 차원에서 행하는 특성을 보였는데, 보속을 실천하는 데에도 시편을 적극 활용하였다. 즉 신앙이 얕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을 때는 매을 700대나 맞았을뿐더러 시편을 50편이나 암송해야 했다. 일반 신앙인이 금식을 지키지 못하였을 대는 무릎 꿇고 시편을 50편 암송하거나 무릎 꿇지 않고 시편을 60편 암송해야 했다.

 

켈트족 그리스도교인들의 열렬한 종교심은 일부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서게르만족으로 구성된 프랑크 왕국 전반기를 지배하였던 메로빙거 왕조 시절에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의 북서부 지역 브르타뉴 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르만족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그들에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는 훈련을 단단히 시켰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관상하는 소명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꼭 켈트족 수도자들의 선교 덕분만은 아니었겠지만, 서게르만족은 아리우스 이단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곧바로 정통 신앙을 접하고 받아들여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동게르만족은 아리우스 이단 사상에 먼저 물든 까닭에 올바른 신앙을 갖기까지 어려운 여정을 걸어야만 했다.

 

 

중세 초기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

 

그리스도교에 의미 있는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다. 수도자들의 선교 활동 덕분에 이 시기에 유럽 전역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지만, 수도원마다 제각기 다른 수도 규칙을 지키며 수도 생활을 하였기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아 서방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나섰던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742-814) 대제는 제국 내의 수도원을 정비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다음 황제인 경건왕 루이(778-840)가 선왕의 뜻을 잇고자 아니안의 베네딕도(750-821) 수도원장에게 개혁의 중책을 맡겼다.

 

아니안의 베네딕도는 당시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연구하여 유럽의 모든 수도원이 초심으로 돌아가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동일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 덕분에 수도원에서는 렉시오 디비나(성독)를 다시 한 번 주목하여 실천하였다. 하지만 아니안의 베네딕도는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을 성경뿐 아니라 고대의 유명한 교부들과 심지어 교황의 저서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수도원에 관상 생활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면서 성무일도뿐 아니라 끝기도 전에 15편의 시편을 더 암송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니안의 베네딕도의 개혁은 곧바로 찾아온 그의 죽음과 수도원 외부의 압박에 의한 개혁 구조, 프랑크 왕국의 분열 등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프랑크 왕국 시절의 수도원은 왕족과 귀족에 의해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이 수도원장을 마음대로 임명하면서 수도원은 늘 정치적 외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 다시 수도원 개혁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910년에 아키켄의 기욤 공작은 클뤼니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수도원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그 후 클뤼니 수도원은 세속 권력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중세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백여 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수도원이 많이 설립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제2대 원장이었던 오도(879-942년) 수도원장은 특히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전례와 렉시오 디비나에서 활력을 얻으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에 성경 주석서, 신학 저서, 교부들의 문헌과 백과사전까지 포함하면서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전례 기도를 강조하면서 매일 138편의 시편을 낭송하였다. 그러나 전례 기도에 필요한 책들을 손으로 필사하는 정신노동이 육체노동을 대신하면서 베네딕도의 수도 생활 정신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고대의 동방 수도자들이 성경 암송을 중심으로 관상 기도를 실천하면서 수도 생활에 도움을 받았다면, 중세의 서방 수도자들은 전체 성경 중에서 특히 시편을 중심으로 전례 기도를 실천하면서 수도 생활에 활력을 얻었다. 한편 중세의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 범위를 확대하면서 성경의 비중을 축소하느 결과도 가져왔다.

 

결국 중세 전반까지 유럽의 수도원은 대부분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성경 독서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의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다만 중세 중반 이후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 생활이 세상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적응의 몸부림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2월호(통권 441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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