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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17: 근세에 성경 묵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화되었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919 추천수0

성경과 영성 (17) 근세에 성경 묵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화되었을까?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은 무엇일까? 15세기경 토마스 아 켐피스가 저술한, 우리말 번역본 제목으로 《준주성범》이라 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신학교와 수도원 및 일반 신자 가정에서 꾸준하게 읽혀 온 베스트셀러이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 오면서 교회 안팎에서 많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변적 영성 생활에 신앙인들은 거부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독일권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이론화한 신비신학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 자체에 모순과 이단 성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영성 생활을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북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던 실천적 영성 생활 분위기는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하느님 중심의 중세 영성 생활은 헤아리기 어려운 하느님의 추상적 개념을 탐구하는 데 집중하여 학문과 생활을 조화시키지 못해 영적 발전을 더디게 했다. 근세 영성 생활은 서서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신앙인들은 초세기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나자렛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 하느님의 개념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데 훨씬 쉽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행적을 모방하는 영적 여정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에는 근세 초기에 출현한 휴머니즘(인본주의)도 한몫을 하였다. 휴머니즘은 인문주의로 불리는 고전 문헌 연구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이 출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곧 공생활을 하는 인간 예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여 그분을 본받고 그분의 행동을 모방하며 영성을 실천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성경 묵상 방법이 나타났다. 신앙인들이 성경을 묵상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중심으로 추리적이고 정감적으로 쉽게 묵상하는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다.

 

 

근세에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영성 훈련, ‘새 신심 운동’

 

중세 중기 이후 스콜라 신학의 영향으로 사변적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면서, 귀고 2세가 단계를 구체화시켰던 렉시오 디비나는 일부 수도원에서만 실천되었다. 교회 안에서 묵상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기에, 신앙인들은 성경 독서 다음으로 하는 묵상 단계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수도자들은 오랜 수도 전통에 따라 스스로 직관에 가까운 묵상을 실천할 뿐이었다.

 

근세 들어 네덜란드에서 공동생활 수도회와 관련하여 시작되었던 ‘새 신심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영성 훈련’이란 실천 영성으로 발전하면서 지성보다 의지 중심의 영성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맥락에서 몇몇 영성 작가는 성경 묵상 중심의 영성 생활을 소개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주로 성경을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고 읽어야 하는지와 어떤 방법을 통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할 수 있는지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 신심 운동의 가장 대표 인물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자들의 수도 생활을 돕고자 저술한 자신의 저서 《준주성범》에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고 권고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경을 쓴 그 정신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의 정묘함보다도 유익한 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므로 자주 해를 받는다. 그대로 읽어 나가도 좋을 것을, 알아들으려고 하고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아 유익을 얻으려면 겸손되이 읽고 순직하게 읽고 또한 성실하게 읽어라”(《준주성범》 제1권, 제5장). 아울러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준주성범》 제1권, 제1장)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토마스 아 켐피스의 지인이었던 그란스포르트는 묵상이 어려운 수도자들을 위하여 《묵상의 사다리》를 저술하였다. 그는 그 책에서 거의 최초의 체계적 묵상 방법으로 여겨지는 단계적 묵상 방법을 묘사하였다.

 

첫 번째는 준비 단계이다. 두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묵상 주제와 관련 없는 생각을 제거하여 묵상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조성한다. 두 번째는 상승 단계이다. 열여섯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자신의 지성과 판단 및 의지를 순차적으로 훈련하면서 실질적으로 묵상한다. 세 번째는 최종 단계이다. 세 개로 세분되는 이 단계에서 묵상자는 전체 묵상 과정에서 자신의 열정적 염원을 하느님께 맡겨 묵상의 전 과정을 총정리한다. 수도자들은 이렇게 체계화한 성경 묵상으로 수도 생활을 개혁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란스포르트, 바르보, 시스네로스가 제안한 묵상 방법

 

북유럽에서 실천된 그란스포르트의 묵상 방법은 파리 근교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몽베어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하여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몽베어는 《영적 로사리오》에서 수도자가 자신의 신심 생활의 장미 정원에서 아주 중요한 세 가지 화단인, 성무일도와 성체성사 및 묵상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첫째,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을 문지르면 시편을 기도하는 동안 연관된 말씀이 수도자가 열망했던 경건한 생각과 의향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 같은 방법으로 내적 신심과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지성이 묵상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몽베어는 그란스포르트의 방법을 거의 가져와서 묵상 단계에 적용하였는데, 사다리의 여러 단계와 그것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취한 다양한 예로 이루어진 지성의 행동을 설명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북유럽에서 전개되던 새 신심 운동과 별개로, 파두아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바르보가 묵상 방법에 관해 언급하였다. 바르보는 《묵상 양식》에서 기도의 세 가지 유형을 언급하였다.

 

첫째, 소리 기도는 초보자에게 가장 적합하다. 둘째, 묵상은 기도의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셋째, 관상은 묵상이 아주 잘 진행되었을 경우 도달할 수 있다. 결국 바르보의 언급은 묵상 방법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관한 묶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바르보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요청으로 스페인 발라돌리드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묵상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려고 이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사용하는 묵상 방법이 스페인까지 알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체계적 묵상 방법은 남유럽의 수도 생활 개혁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에서는 훗날 발라돌리드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도원에 속한 시스네로스가 체계적 묵상 방법을 넘어서 총체적 영성 훈련과 관련한 표준 지침서에 해당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시스네로스는 《영성 생활을 위한 훈련》에서 세 주간에 걸친 영성 훈련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시스네로스의 영성 훈련 방법은 경당에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정해진 주제를 묵상하고, 성경을 암송하며 잠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경당을 나서는 것이다. 정해진 주제는 주간마다 다르다.

 

첫 번째로 정화 주간에는 거룩한 두려움과 통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한 주제를 묵상하였다. 두 번째로 조명 주간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주제를 묵상한다. 세 번째로 일치 주간에는 현세에서 초탈하여 하느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하느님의 속성에 관한 주제를 묵상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께 상승해 나아간다. 시스네로스는 구세주의 생애에 관한 세 가지 관상 방법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첨가하였다. 즉 우리는 처음에 구세주의 거룩한 인성을 바라보다가, 다음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구세주의 인성을 넘어 신성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근세 영성 작가들이 저술한 체계적 묵상 방법에 관한 작품들은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 생활을 쇄신하여 영성 생활 발전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체계적 묵상 실천은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평신도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신심 깊은 평신도는 영성 훈련을 쌓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다만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도 성경 독서를 권고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달랐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이 세속의 이념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한 것이 아니라, 고전 문헌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서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는 영성 생활 발전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결국 근세에 나타났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체계적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영성 훈련의 분위기는, 르네상스(문예 부흥)와 종교 개혁으로 인한 이교적·이단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영성 생활을 준비시켰다고 볼 수 있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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