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나 주님이 이 땅에 있음을 성경에 ‘재앙’이란 말이 맨 처음 나오는 구절은 어디일까요? 성경의 시작이 창세기니까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창세 7,6-8,14 참조)에 나올 법하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홍수 이야기에서는 홍수가 났다고 하지 재앙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재앙’은 창세 12,17에 처음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다.” 아브람이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파라오는 아름다운 사라이를 보고 아브람에게 잘해 줍니다. 아브람은 사라이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는데, 이 일로 파라오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재앙을 겪은 파라오는 아브람과 사라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떠나보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권력자 파라오와 다른 모습이네요. 창세기의 파라오 탈출기의 파라오 언뜻 보기에 창세 12,10-20(‘이집트로 간 아브람’)과 탈출 6,28-11,10의 이야기는 비슷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내용이 같으니까요. 그러나 재앙을 겪는 파라오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의 파라오는 아브람을 순순히(어찌보면 제발 떠나 달라고 애원하듯) 떠나보내지만, 탈출기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 내보내지 않습니다. 재앙에 대처하는 이 상반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하느님께서 탈출기의 파라오에게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가 쓰인 구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7,5). 재앙은 하느님과 파라오의 대립을 극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장치인데, 그 근본 목적은 파라오의 패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이집트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답을 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파라오는 아홉째 재앙까지 겪으면서 그 답을 구할까요? 재앙의 순서: 물이 피가 됨, 개구리 소동, 모기 소동, 등에 소동, 가축병, 종기, 우박, 메뚜기 소동, 어둠 재앙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물이 피가 되다, 개구리 떼가 이집트 땅을 뒤덮다, 이집트 땅의 먼지가 모기로 변해 사람과 짐승에게 달려들다, 등에 떼가 땅을 폐허로 만들다, 흑사병으로 이집트의 집짐승이 모두 죽다, 이집트 사람과 짐승에게 종기가 생기다, 우박이 쏟아져 사람과 짐승이 우박에 맞아 죽다, 메뚜기 떼가 온 땅을 덮어 들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다, 짙은 어둠이 사흘 동안 이집트 땅을 덮다. 재앙의 강도는 점점 세집니다. 넷째 재앙까지는 그야말로 소동에 불과하지만, 다섯째 재앙부터 사람과 짐승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아홉째 재앙이 ‘어둠’이라 시시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재앙의 전조입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겪는 파라오의 태도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요술사들에게 재앙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게 하여 재앙에 대항하고, 재앙이 좀 심각하다 싶으면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고 거짓말하며 꼼수를 부립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모세에게 부탁까지 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끝나면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완강)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탈출 7,13; 7,22; 8,11; 8,15 참조).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탈출 8,28; 9,7 참조). 파라오 이 사람, 어찌 그리 고집불통인가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뜻은? 성경은 파라오의 마음이 ‘완고하다’, ‘완강하다’고 표현합니다. 사전은 ‘완고하다’를 ‘융통성이 없어 올곧고 고집이 세다’고 풀이합니다. 이 뜻을 파라오에게 적용하자니 뭔가 꺼림칙합니다. ‘올곧다’는 말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진정 올곧은 사람이었을까요? 글쎄요. 재앙으로 백성이 죽든 살든 상관없이 자기 권력만 유지하려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아닌가요? 한편 어떤 이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탈출 7,3; 9,12; 10,20; 10,27; 11,10 참조)며 의구심을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탈출 4,21). 이 말씀에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 주체는 분명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파라오를 완고하게 하신 분은 하느님인데, 파라오가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다고 재앙을 내리신 분도 하느님인가? 하느님께서 원인을 제공하고 심판까지 하시니, 하느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시나?’ 정말 그런 걸까요?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완고해지는 파라오의 마음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는 뜻입니다. 지난 호에서도 말했듯,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파라오를 해치우고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순간 이동시키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앙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선택게 하는 중대한 계기입니다. 파라오는 재앙을 겪고도 자신만 옳다고 믿었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매’인 재앙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재앙이 회개와 구원의 선물이 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풀려면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에게서 ‘소신’과 ‘고집’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미국의 배우 겸 시인이자 시민운동가로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흑인 전차 차장이었던 마야 안젤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신과 고집은 다르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돌 벽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벽이 돌로 되어 있고, 자신의 머리가 피가 통하는 살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벽이 돌로 되어 있고, 자신의 머리가 살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의 완고함도 풀릴 것입니다. 요즘 ‘소통’이라는 말이 자주 화두가 됩니다. 누군가와 잘 소통하기 위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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