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길을 떠났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콩쥐팥쥐 이야기는 어머니를 여읜 콩쥐에게 계모와 팥쥐가 오면서 시작됩니다. 끝은 콩쥐가 원님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해피엔딩(행복한 결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의 끝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 결말도 있고, 뚜렷한 해결 없이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도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열린 결말을 취할 때 성격 급한 이는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다는 거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잘 됐든 못 됐든 확실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좋습니까? 탈출기의 시작과 끝 탈출기는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탈출 1,1).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을 이끄는 구름’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그 모든 여정 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탈출 40,38). 시작과 끝을 중심으로 탈출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의 구름을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다’가 됩니다. 그런데 탈출기를 처음 읽은 사람들은 결말이 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이야기가 끝나는 것 아닌가? 어째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네.’ 그렇습니다. 탈출기의 끝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고된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고 모진 광야 생활을 견디어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잘 먹고 잘 살았다’ 하고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길을 떠났다.’ 이것이 탈출기의 결론입니다. ‘열린 결말’이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탈출기의 행복한 결말은 어디에? 먼저 우리가 짐작하는 결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그것은 오경(하느님과의 계약과 기본 체험이 담긴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아닌 여호수아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었다. …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네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까요? 하느님 말씀을 고분고분 듣고 그분을 충실히 믿으면서 그 땅을 점령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자 모세를 시기합니다(민수 12장 참조). 그 결과 미르얌은 악성 피부병에 걸립니다. 지도층이 이런데 백성인들 오죽하겠습니까? 백성은 여전히 광야 생활에 대해 불평합니다. 풍요롭던 이집트 생활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겠노라 누누이 말씀하시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고 샛길로 빠지고 급기야 반란을 일으킵니다. 모세를 끌어내고 자기들만의 우두머리를 내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선동합니다(민수 14장; 16장 참조). 시나이 산 아래에서 벌인 금송아지 사건을 까맣게 잊은 채 또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 분노하십니다. “이 백성은 언제까지 나를 업신여길 것인가? …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것인가?”(민수 14,11) 과연 목이 뻣뻣한 백성입니다. 모세마저 잘못을 저질러 하느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이 말씀대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고령(120세)으로 죽은 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애썼고, 하느님의 도구로서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이 되도록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염려합니다. 온갖 죄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당부합니다(신명 32,46-47 참조). 어째서 그들은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을 그토록 잊지 못할까요? 왜 사춘기 청소년처럼 반항하고 방황할까요?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여 실행하지 못할까요? 좌충우돌하는 그들이 참으로 딱해 보이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삶을 탈출기에 배춰 본다면? 내 삶을 탈출기에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까? 나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집트는 무엇입니까? 그 이집트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합니까? 혹여 이집트 생활이 그리워 그곳에 돌아가려 하지는 않습니까? 나의 최종 목적지, 가나안 땅은 어디입니까? 지금 그 땅으로 가고 있습니까? 가는 길이 힘들어 주저앉지는 않았는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온 길을 거슬러 이집트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삶의 여정에 누가 함께 계셨는지, 고통에 짓눌려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내 곁을 지켜 주신 분이 누구였는지…. “그러니 이제 가거라.”(탈출 4,12) 탈출기에는 결말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출기의 ‘열린 결말’은 은총의 표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자유와 생명과 평화가 가득한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우리에게 인자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탈출 4,12). 머물겠습니까, 떠나겠습니까? 하느님을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 그가 바로 탈출기의 주인공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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