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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206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

 

 

* 창세 22장을 읽을 때 문득 ‘단장(斷腸)’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났습니다. 어미 원숭이가 사람들에게 잡혀 가는 제 새끼를 보고 슬퍼하다 죽었는데, 그의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하지요. 부모에게 자식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있을까요? 제가 아브라함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요?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시험하시나요?(20대 윤 라파엘라 님)

 

 

시험처럼 우리를 긴장시키는 단어가 있을까요? 학교에서 치른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외에 각종 자격 시험과 승진 시험 등 온갖 시험이 인생 여정과 함께합니다. 사회에서 그만큼 시달리면 됐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자 시작한 신앙생활에도 시험이 있다니, 놀랍고 당황스러운 자매님의 심정 백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시험이 스트레스만 주던가요?

 

창세 1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구원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말씀에 아브라함이 응답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부부가 이집트와 가나안 땅 여기저기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약속을 거듭 갱신하십니다. 이에 그 둘의 신뢰 관계는 꽤 굳건해집니다. 그 표시가 창세 15장과 17장에 나오는 계약입니다. 마침내 사라가 아들 이사악을 낳자 하느님의 약속이 이뤄집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접어들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의 말씀이 쓰나미처럼 몰아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우리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말씀이지만, 맏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신에 대한 최고의 흠숭으로 여긴 고대의 종교 문화에서는 그만큼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통째로 살라 신에게 바치는 번제물은 온전한 봉헌, 신에 대한 온전한 승복을 의미했으니까요. 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의 맥락에서 이 말씀은 당신의 약속과 계약을 스스로 무너트리게 하시는 것 같아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창세 22,1) 이 말씀을 하셨다니, 그분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시험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서 처음으로 ‘시험’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 진행된 아브라함의 삶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된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창세 12,1)을 떠날지,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어찌할지, 아들이 태어나기를 마냥 기다려야 할지,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야 할지 등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때로는 믿음으로 이런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이사악 봉헌은 마지막 종합 시험, 시험인 줄 모르는 진짜 시험입니다.

 

사회에서 시험을 보는 이유는 대상자의 실력과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일을 할 만한 상태인지, 일을 맡을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전체에게 복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지, 그 기초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 상태와 충실성은 어떤지 분명히 알고자 하십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경외하는지’(창세 22,12 참조), 하느님을 가장 우선하고 두려워하며 그분께 순종하는지 확인하려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성취시킬지, 당신을 어떻게 더 계시해 줘야 할지, 아브라함의 어느 면을 더 정화하고 굳건하게 해야 할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아는 하느님의 모습을 넘어섭니다. 벼랑 끝까지 내모는,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요구하는 신앙의 깊은 신비로 들어가는 문턱입니다.

 

긴장하며 치른 시험이 끝날 때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고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다 아시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건과 역사의 방향을 알고 이끌어 가시지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에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그의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험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해당합니다. 둘의 관계를 가늠하는 이 시험이 아브라함에게도 모험이지만 그를 믿으시는 하느님에게도 모험입니다. 그런데도 시험을 내시는 까닭은 그의 믿음을 성숙시키고 구원사를 진전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시험은 계속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들을 시험하십니다(탈출 15,25: 16,4; 20,20; 신명 8,2.16; 13,4 참조). 그들을 해방시키고 인도하시는 주님(야훼)을 그들의 하느님으로 신뢰하며 당신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지 시험하십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시험합니다(탈출 17,2.7; 민수 14,22 참조). 이스라엘 역사 곳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판관 2,22; 3,1.4; 2역대 32,31; 시편 26,2 참조). 특히 욥기에서 이를 깊이 다룹니다(욥 1-2장 참조).

 

흥미롭게도 히브리 말 ‘나사(nasah)’와 그리스말 ‘페이라조(peirazo–)’는 ‘시험, 시도’와 함께 ‘유혹, 검증’이란 뜻을 지닙니다. 어떤 사건을 시험으로 볼지 유혹으로 볼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신앙인을 유혹하시지는 않지만 당신께 충실한지 여부는 시험하신다고 일러 줍니다(1코린 10,13; 히브 2,18; 11,17; 묵시 3,10 참조). 그 시험은 우리를 위협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기 위해 부여되는 게 아니라, 우리 상태를 파악하여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창세 22장에서 이사악이 아브라함을 믿고 따랐듯, 아브라함도 이제까지 살면서 하느님을 참으로 믿을 만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아버지로 체험했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심연으로 나아갔습니다. 말없이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시험은 나를 알고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는 야훼 이레의 믿음은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일상에서 그분의 정의와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자매님이 겪으실 수 있는 신앙의 시험에서 그 은총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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