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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사제는 복의 인증서입니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730 추천수0

[성경의 숨은 이야기] 사제는 복의 인증서입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 인사를 올리려니, 베드로 사도의 기쁨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공동번역 1베드 3,21)이라는 말을 새기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은혜가 임하셨을 줄 믿습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전 신자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매일 하루치를 읽으며 읽기 표에 표시를 합니다. 한 칸 한 칸 채워 나가는 일이 꽤 즐겁네요.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는 자세가 좀 엉망입니다. 서서 읽다가 앉아서 읽다가 하물며 침대에 엎드려 읽는 적도 많습니다. 잠깐 틈이 나거나 눈을 붙일 요량일 때도 얼른 성경을 챙기는 건 분명 ‘이쁜 짓’이지만, 이리저리 뒹굴거리는 모양새는 솔직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한 자세로 성경을 읽어 온 덕에 성경 읽기는 저에게 가장 편하고 쉽고 친근한 일로 자리 잡았으니, 주님께서도 귀엽게 보아 주시리라 여깁니다.

 

그런데 어제는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뜨끔했습니다. 그의 생활 기록에서 유난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1사무 1,9)거나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1사무 3,2)는 구절이 눈을 찔렀습니다. 마침내 엘리 제사장이 “대문 옆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더니 목이 부러져 죽었다”(1사무 4,18)는 비참한 상황을 전하면서도 굳이 ‘몸까지 무거웠던 것’이라고 설명하는 게 꼭 ‘살 좀 빼라는 눈총’ 같았습니다. 꼴사나운 제 모습이 꼬집힌 느낌, 여태 알싸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하신 걸까요?

 

창세기는 처음으로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한 인물이 아담의 삼대 손, 에노스였다고 전합니다(공동번역 창세 4,26 참조). 그러나 첫 사제는 아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너에게 가까이 오게 하여, 사제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탈출 28,1)고 하시며 아론과 그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제로 세우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르신 다양하고 복잡하고 세밀한 지령들은 우리에게 그분의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가늠하도록 합니다. 이 영예로운 사제의 복을 몽땅 허사로 만든 인물이 뚱뚱보 엘리 사제였다니, 쯧쯧 혀를 차게 됩니다.

 

“나는 일찍이 네 집안과 네 조상의 집안에게 내 앞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1사무 2,30)는 주님의 선포를 들으며 우리는 한 번 약속하면 절대로 변치 않으시는 주님의 뜻을 ‘내가’ 얼마든지 흔들어 헐어 버릴 수 있다고 깨닫게 되는데요. 얼핏 읽으면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시킨 듯 보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바꿔 버린 일이 유감스럽습니다.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께서 오락가락하시다니, ‘어찌 이럴 수 있나’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서운하다고 삐쭉대고 뾰로통하시니, ‘이를 어쩔꼬’ 싶습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 위해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갖은 허물을 찾는 분, 심술궂은 분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하신 걸까요? 엘리 제사장의 잘못은 아들들이 패악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 똑 부러지게, 따끔하게, 철저하게 훈육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사실 ‘뿐’입니다. 이 단순한 게으름을 주님께서는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1사무 3,13)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바로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1사무 2,29)이라 단죄하십니다.

 

사실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키워낸 존경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는 기막힌 현답을 가르친 지혜로운 스승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결코 뭘 몰라서 자식들을 방종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식을 믿음의 자녀로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얘깁니다. 더욱이 그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큰 복을 전해 준 성실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 아들들에게는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을까요?

 

이 딱한 상황을 요즘 우리에게 대입해 봅니다. 엘리 사제도 마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짚어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되, 세상의 힘도 함께 숭배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솔직히 괜찮은 장사 같습니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복도 챙기고 세상 득도 보는 ‘물 좋고 정자 좋은’ 탁월한 선택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눈에 보이는 세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온갖 복이 깡그리 사라질까 염려하십니다. 당신의 강복 말씀이 모두 귀동냥에 그칠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처럼 후손의 축복을 깨부수는 조상이 될까 조바심을 내십니다.

 

 

주님께서는 부모가 ‘오냐오냐’하며 자식을 방치하는 일을 탓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버이들에게 당신의 자녀를 맡기셨습니다. 그분을 제대로 알고 깨달아 섬기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1사무 3,19) 계시며 강복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이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더 먼저 알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잇속에만 치우쳐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그르치게 내렸다”(1사무 8,3)는 말을 들었던 사무엘의 아들만 보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자랑이었던 히즈키야 임금의 아들이 하느님께서 도무지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실 만큼 악했던 므나쎄 임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하느님께서는 그 어려움을 충분히 꿰고 계실 터입니다(2열왕 24,3-4 참조).

 

엘리 사제는 자신이 자자손손 이어질 사제 가문의 영예를 송두리째 잃게 하는 조상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너의 기운과 네 조상 집안의 기운을 꺾으리니, 네 집안에는 오래 사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내가 너의 가족 가운데 내 제단에서 잘라 내지 않을 자마저도,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슬퍼지게 하겠다”(1사무 2,31-33)는 저주의 말씀에도 유구무언이라 “그분은 주님이시니, 당신 보시기에 좋으실대로 하시겠지”(1사무 3,18)라며 자포자기하듯 살아가고 있다면, 바로 그날 ‘염소 파트’에 줄을 선 예행 연습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다 자란 아들네의 불량함은 그들의 몫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엘리 사제의 삶을 통해 부모가 ‘오냐오냐’하며 자녀의 삶을 방치하는 일을 직무유기로 보신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이라 믿습니다. 한마디로 ‘자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부모님의 처지는 도무지 ‘정상 참작’이 되지 않는다는 선포라 믿습니다. 자녀의 신앙생활에 ‘그만하면 됐다’는 방임이나,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세례 받았으니 됐다’며 신앙생활의 면제권을 남발하는 일은 주님께 용납될 수 없는 죄임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기분 좋은 부활 인사로 시작한 글이 따가워졌습니다. 사과드리는 마음으로 엘리 사제의 이야기에 담긴 ‘대박’ 비밀 하나를 선물해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한참이나 모자랐던 엘리 사제를 통해서도 당신의 복을 흠뻑 내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눈물의 기도를 올렸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 주실 것”(1사무 1,17)이라고 장담한 엘리 사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더욱이 덜떨어진 엘리 사제의 인품을 개의치 않으시고 사무엘을 맡아 키우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이나 어떤 경우의 사제를 막론하고 함께 일하신다는 보증이라 믿습니다. 잘난 것 없어 보이는 사제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통해 복을 내리시며 기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주님께서 세우신 사제 모두가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의 도구이며 기쁜 선물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한나처럼 사제를 향해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신자가 많아져 사제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나처럼 ‘해마다’ 이어지는 질긴 헌신으로 사제를 감동시키는 분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하여 “주님께서 … 그대에게 갚아 주시기 바라오”(1사무 2,20)라는 축언을 듣는 분이 늘어나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한나처럼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생각을 … 그리스도께 순종”(2코린 10,5)시켜서 그분께 얻은 귀한 ‘복의 인증서’를 한껏 사용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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