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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착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181 추천수0

[성경의 숨은 이야기] 착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세상이 소란합니다. 세상에서 “마음이 산란했다”고 하시던 주님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주님께서 살아 내신 고달픈 삶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데, 왜 이 모양인가 싶어 죄송할 뿐입니다. 그저 주님의 기쁨이 우리 덕에 훌쩍 자라나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방송을 준비하면서 병든 세상의 거친 호흡을 듣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꿈은 창세 이래에 변한 적이 없으며 늘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1열왕 5,5) 살아가기를 열망한다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리스도인마저 세상의 성공 요법에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어도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궁리만 할 뿐, 악과 죄의 음산한 그늘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야고 1,14)이라는 말씀이 마음을 꼬집었습니다. 세상의 성공 요법이 그야말로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행위이며 언어라는 것을 어찌 일깨울지 아득했습니다.

 

 

‘주님의 궤’가 도착했다는 사실에 겁에 질린 필리스티아 군인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엘리 제사장 시절,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이스라엘군은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합니다. 전쟁터에 주님의 ‘계약의 궤’를 모시고 출정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도록 할 셈이니, 일면 대단한 믿음의 모습 같습니다. 그날 그들이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으로 환호했다니 그분의 능력을 참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학살을 당하였고 ‘하느님의 궤’까지 약탈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1사무 4장 참조). 기가 찬 일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주님의 궤를 팽개치듯, 이방인의 손에 농락당하게 하신 일이 믿기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날 벌어졌던 일을 제법 소상하게 알려 줍니다.

 

그날, 이스라엘 진영에 ‘주님의 궤’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필리스티아 군인들이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었던 사실을 전합니다. “우리는 망했다”고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라는 탄식을 들려 줍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기로 맹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밝힙니다. 그날 필리스티아인들은 승리한 기쁨에 더해 적국의 신 ‘주님의 궤’까지 차지했으니 엄청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적국의 신’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모두 흥겨워하며 ‘다곤’의 강한 힘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밤새 축제를 벌였을 것도 같습니다. 그날 다곤의 신전에 ‘주님의 궤’를 봉헌하면서 느꼈을 기분도 알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이방 신이라 여겼던 ‘주님의 궤’를 공손히 다루어 다곤의 신전에 고이고이 모신 점이 갸륵합니다. 물론 적국의 신도 잘만 모시면 ‘덕을 볼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다곤의 신상 곁에 주님의 궤를 안치하며 사이좋은 ‘동무’가 되어 더 많이 강복해 달라고 빌었으리라 어림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에 변고가 발생합니다.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1사무 5,3) 있는 해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연이어 다곤의 몸통만 남고 머리와 두 손이 잘려 문지방 위에 널부러지는 사고가 잇따릅니다. 다곤의 신전이 있던 아스돗인들의 몸에 종기가 나는 괴이한 현상이 생깁니다. 보다 못해 얼른 주님의 궤를 갓으로 옮겼더니 아뿔싸, 갓의 주민들마저 종기를 앓아 드러눕습니다. 괴이합니다. 성경은 “어찌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 옮겨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1사무 5,10)라는 백성의 아우성이 하늘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에 덧붙여, “주님의 손이 아스돗인들을 짓누르시어 망하게 하셨다”(1사무 5,6)고 표현하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도록 합니다.

 

백성의 마음이 꺾여 “전쟁에서 이기면 뭐하노?”라고 탄식하는 모습이 선합니다. 그리 생각하니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과하다 싶습니다. 만민의 주님이신데 그리 혹독하게 구실 것이 뭔가 싶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을 왜 모르시는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으시는 옹졸함이 야속합니다. 하느님이시니 다곤의 신전에서도 얼마든지 ‘더 좋은 수’를 쓰실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애당초 전쟁터에 주님의 궤를 옮겨가지 못하도록 조처하셨더라면 나았을 법하고, 주님의 궤를 앞세우며 승리를 확신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아서 이기게 했더라면 훨씬 매무새가 무난했을 것이다 싶습니다. 결국 필리스티아의 힘없는 민초까지 싸잡아 고통을 당하게 하시다니,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척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신의 지킴이를 자처하는 모양새

 

그런데 필리스티아인들의 자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의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여 묘수를 세웁니다. 다곤 신의 사제들과 점쟁이들에게 이 끔찍한 일의 연유를 알아 내고 그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아마도 그날 필리스티아의 대장간이 개업 이래로 가장 분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느닷없이 “금으로 종기 다섯 개를 만들고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1사무 6,4) 내느라고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드디어 점쟁이들의 계략대로 젖먹이 새끼를 뗀 어미 소들에게 ‘주님의 궤’가 담긴 수레를 끌도록 했을 때, 어미 소들이 울며불며 벳 세메스로 곧장 나아가는 걸 보면서 모두 탄성을 올렸을 것입니다(1사무 6,8-12 참조). ‘참으로 용한’ 족집게 처방에 너도나도 감탄했을 것입니다. 꼬박 일곱 달 동안이나 이어지던 몸서리치는 재난에 마침표를 찍어 준 그들의 공로는 자자손손 대를 이은 가문의 영광이었을 듯도 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솟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궤’로 인해 다곤의 신상이 무참히 부서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현장은 다곤에 견줄 수 없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차리도록 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곤 신상이 “은과 금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낸 것”(시편 135,15)임을 분명히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만이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곤을 섬기는 일에서 요지부동이니,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날의 상황을 그려봅니다.

 

그날 아침 신전에 들어서서 기겁하는 모습이 상상되고 허겁지겁 손상된 다곤 신상을 말끔히 치우는 모습을 봅니다. 어서 신상을 원상 복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얼굴들, 새 신상을 구하려고 두 발에 땀이 나도록 헤매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민망한 사건이 소문나지 않도록 눈 단속 입 단속에 애쓰는 모습도 생각납니다. 어쩌면 그 추한 꼴을 숨기려고 신전 앞에 ‘내부 장식으로 쉽니다’는 팻말을 큼지막하게 내걸었을 것도 같습니다.

 

이쯤에서 생각이 바뀝니다. 함께 모여 궁리한 결과가 고작 쓰러져 너부러진 신에 빌붙어 먹고 살던 다곤의 사제와 점쟁이들에게 비방을 물었다니 딱합니다. 그 ‘처방’에 열심히 따르는 행태가 초라합니다. 금으로 종기 다섯 개와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치성과 정성을 다하는 꼴이 애처롭습니다. 한술 더 떠서 다곤의 신전에 드나드는 이들에게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이 널려 있던 문지방만은 밟지 못하도록 규칙을 정하여 “오늘날까지도”(1사무 6,18) 준엄하게 지키고 있다니 어이없습니다. 되려 인간이 신의 지킴이를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며, 이렇게 빤한 엉터리 지론으로도 얼마든지 인간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농락하는 사탄의 계략을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는 진리를 선포하신 줄 믿습니다. 교회가 온 세상으로부터 “과연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십니다. … 다른 신이 없습니다”(이사 45,14)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만든 신들과 결코 동무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밝히신 것이라 믿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세상 관념에 끝까지 너그러울 수 없다는 차가운 경고이며, 당신 자녀들이 점쟁이도 찾고 부적도 챙기는 못난 짓거리를 당장에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일깨움으로 듣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둘러싼 가시를 봅니다. 꼭 그분 가슴에서 가시를 뽑아 드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또, 다시, 거듭, 좋은 게 좋은 줄로 ‘착각’합니다. 주님 심장에 가시를 더 깊이 꽂습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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