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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주님을 속이려 들다니, 뭔 배짱인가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821 추천수0

[성경의 숨은 이야기] 주님을 속이려 들다니, 뭔 배짱인가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전해 줍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밑거름이 신자들의 아낌없는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짠합니다. 사랑과 헌신과 봉사의 삶을 통한 그들의 굳센 믿음이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은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상을 제법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세상이 꿈꾸는 이상향이 이 땅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싶은데요.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하기에 온 힘을 다해 교회를 아꼈던 교우들과 함께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초대 교회의 신자 부부입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할 계획을 세울 만큼 신앙이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봉헌금을 바치려던 때, 사도들 앞에서 즉사하는 비극을 겪습니다(사도 5장 참조). 쪼들리는 재정 형편에 재산을 헌납하는 교우는 큰 은인일 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정반대로 응대하신 셈입니다.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사도 5,4)이라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아가십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검은 속셈

 

초대 교회의 살림살이가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의 도움을 받던 과부들이 홀대를 받아 불평을 털어놓은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하여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사도 4,34)는 기적 같은 공동체를 일구었습니다. 그리 살필 때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교회를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자 한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교우들의 처지가 참으로 가슴 아파 보탬이 되려 한 마음도 진짜였을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비하면 ‘무엇도 귀하지 않고 아깝지 않다’는 생각에 따른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뒷간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ʼ는 속담처럼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했던 마음이 눅눅하고 퀴퀴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라는 생각으로 궁금해 안달하는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경은 시시콜콜한 그들의 변명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초대 교회에서 ‘땅이나 집’을 팔아 봉헌한 사람 중에는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사도 4,36)이 포함된 사실을 밝힙니다. 아울러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는 교회의 평판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쯤에서 ‘반짝’ 하고 뭔가 짚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검은 속셈을 엿보게 됩니다. 그 부부가 봉헌을 결심하게 된 빌미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교우들에게서 칭송과 존경을 받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바르나바가 교우들에게서 존경받고 우대받는 일을 샘냈습니다.

 

결국 바르나바처럼 대우를 받기 위해 그를 흉내냈을 뿐이라는 진단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바르나바의 봉헌금보다 액수가 컸던 것 같기도 한데요. 딱 바르나바만큼만 헌금하면 충분히 존경받고 인정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렸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으니 생각할수록 아까웠을 것입니다. 잔꾀를 부릴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사도 5,2) 바치기로 작정하면서 부부는 ‘하이파이브’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은 주님께서 그들의 ‘변심’을 못 견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 그런 꼼수가 통할 리가 만무하다는 점입니다.

 

 

돈의 유혹에 휩쓸려 하느님을 배신하고 거짓말까지 한 잘못

 

그러고 보니 매사 우유부단한 베드로 사도가 그날따라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는 모습이 의외입니다. 단호하게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사도 5,3) 하고 추궁하는 모습이 어색합니다. 까칠하게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 하고 취조하듯 따지는 일도 평소의 베드로 모습이 아닌 듯 보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날 베드로 사도의 입을 빌려 판결을 내리셨다고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다시 그날의 현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기분 좋게’ 교회 모임에 갔을 사피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두리번 대며 자신을 ‘알아 주는 시선’을 신경 썼을 것도 같고 가벼운 걸음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을 것도 같습니다.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기대하며 존경받는 위치에 어울리도록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썼을 것도 같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이 돋보이도록 좀 더 우아하게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불행이 더욱 가엾고 처량합니다.

 

그런데 그날, 남편 하나니아스의 목숨을 거두신 주님께서 아내 사피라를 한나절 동안이나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사피라만이라도 진실을 고백하리라 간절히 고대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떠올려 봅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사도 5,4)을 가졌느냐는 나무람 속에서 “잘못했습니다”는 한마디를 고대하셨을 주님의 심정을 만납니다. “이만큼 받고 팔았소?”(사도 5,8)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아닙니다” 하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틀림없이 용서해 주셨으리라 헤아립니다.

 

저는 그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봉헌할 것을 의논했을 때, 주님께서 진실로 감격하셨으리라 느낍니다. 때문에 그들의 봉헌에 주님께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로 갚아 주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돈의 유혹에 휩쓸려 당신을 배신하고 끝내는 거짓말까지 보태는 일을 못견디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깊고 아린 ‘사랑의 배신’에 몸서리를 치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욕정에 따른 욕심으로 하느님과 적의를 쌓아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의 행태에 매운 판결을 내리시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싶습니다(야고 4장 참조).

 

그들은 믿음이 깊었던 초대 교회의 신자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했던 것을 볼 때 교회 일에도 적극 나서서 협조했던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과 사랑이 거짓말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언어가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평소 찬미의 언어에 익숙해지라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앞을 가로막고 말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를 지은 후의 우리 모습에 주목하십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거짓말하지 마라’는 십계명을 수없이 범하는 우리를 위해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받게 되는 회개의 길까지 마련해 주십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이 허락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지만 돈은 더 좋다’는 생각을 염려합니다. 요즈음 교회에 최선의 헌금을 바치는 이들이 드물어 애통합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그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야릇한 심리가 안타깝습니다. ‘체면’을 생각하여 마지못해 ‘생색’을 내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진리이신 그분에게는 진심이 아닌 것은 모두, 진정이 아닌 것은 전부 외면당하고 거부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주님과 한 약속을 저버립니다. 주님만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묵살합니다. 온통 ‘더 가질’ 계획에 골몰하여 헌금을 아까워하는 어리석음의 포로로 전락합니다. 마침내 주님을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로 여기는 만용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진정 두려운 삶의 행태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바로 지금,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는 두려운 분이십니다. 그날 주님의 성전에 침투하여 맹위를 떨치던 사탄의 어둠은 우리의 허한 성정을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한 약속을 배반하라고 종용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유인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의 재를 뿌리고 주님을 위한 선한 계획을 흔들어 댑니다. 이러한 사탄의 갖가지 훼방 작전은 현재 진행형이며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유혹이자 시험입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여 지상에서 사용하는 마지막 언어가 ‘찬미의 언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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