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이야기] 이해하고 싶습니다, ‘요아스 임금의 변절’ 갈수록 세상이 험해진다고 합니다. 세상의 뉴스는 온갖 재난과 사고를 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의 할머니는 흉한 소식이 들리면 으레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늘 무서운 줄을 알아야제….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노?” 구구절절 내용을 캐는 손자들에게는 무서운 표정으로 가림막을 치셨습니다. “뭐 좋은 거라고 알라카노? 몰라도 된대이….” 어른이 되니 알고 싶지 않은 일도 있다는 걸, 몰라도 될 일이 수두룩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때처럼 할머니가 세상의 흉한 소식을 몽땅 가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옛날 옛날의 인간사도 특별히 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땅의 첫 사람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일에서 시작된 흉보(凶報)는, 세기의 살인마 라멕에게 이르면 입이 쩍 벌어지게 합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창세 4,23). 어찌 인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진실로 하느님 곁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가 되는 일이 얼마나 악한지 가늠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몸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면, 바로 그곳이 “에덴의 동쪽 놋 땅”(창세 4,16)이며 죄악의 터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아스 임금의 가엾고 기구한 팔자 유다 임금 요아스는 주님께 충실했던 여호사팟 임금의 증손자입니다. 당시에 막강했던 북이스라엘 임금이 외할아버지입니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복덩이 아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 살 남짓한 때에 모진 칼바람이 닥칩니다. 유다 임금 여호사팟이 이스라엘 임금 아합 집안과 사돈이 되어 얽히고설킨 사연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열왕기 사연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워 역대기까지 뒤져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를 벌벌 떨게 한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은 악녀의 대명사로 기억하면서도, 악한 행위로 따질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합의 딸 ‘아탈야’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2역대 24,2)고 기록된 요아스 임금, “사악한 여자 아탈야와 그의 아들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거룩한 것을 모두 바알들을 위하여 써 버렸던 것”(2역대 24,7)을 보수했던 열정적 믿음의 소유자 요아스가 폭군으로 삶을 마감한 사실도 지나쳐 버립니다. 요아스 임금의 족보가 워낙 복잡하게 꼬인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기억하기 좋은 김씨 이씨 왕조가 아니라 꼬부랑 이름들이 오락가락대는 탓에 더 심드렁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면 관계상 이 글을 요아스의 증조부 여호사팟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다만 2열왕 8,16-11,16과 2역대 21-24장을 읽으면 요아스 임금의 가엾고 기구한 팔자가 좀 쉬이 이해될 것이라고 팁을 달겠습니다. 똘똘한 임금 요아스는 왜 폭군이 되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그날, 아들 아자르야가 이스라엘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머니 아탈야의 포악한 행동입니다. 대번에 유다 집안의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2열왕 11,1)니 이런 변이 있나 싶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고모 여호세바가 재빠르게 움직여 요아스 왕자를 구출하는 장면은 참으로 스펙터클합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기에게 허락된 삶은 ‘죽은 듯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왕족을 몰살하고 기세등등하게 왕위를 차지한 아탈야 할머니와 한 왕궁에서 지내야 했으니, 그 두려움의 무게에 마음이 섬뜩합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는 할머니에게 자기 존재를 들키지 않는 것이 급선무였을 손자의 처지가 풍전등화라 여겨져 애처롭습니다. 할머니의 눈에 띄면 곧장 죽을 터이니 말 그대로 살아도 살았다 할 수 없는 파리 목숨 신세였으니까요. 때문에 요아스는 주눅 들어 눈치만 백 단인 아이로 성장했으리라는 짐작이 듭니다. 왕궁이 여염집보다야 훨씬 웅장하고 넓었을 테지만 자그마치 여섯 해 동안 왕궁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유모와 함께 숨어 지내는 일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2역대 22,10-12 참조). 더욱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요?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이라고요? 하늘이 도왔다고요? 물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과 맺으신 계약 때문에, 또 일찍이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등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2역대 21,7) 다윗의 집안인 유다 왕족을 멸망시키려 하지 않았다고 밝히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요아스를 죽이려던 장본인이 친할머니라는 사실은 너무 끔찍합니다. 정말 하늘이 무섭지 않았는지 묻게 됩니다. 요아스 왕자의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일곱 해 되던 때에 여호야다 사제는 쿠데타를 모의합니다. 유다의 레위인들과 이스라엘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여 ‘다윗의 자손’인 요아스 왕자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요아스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사리분별도 힘든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고모부 여호야다의 야무진 종교 교육이 요아스로 하여금 똘똘한 임금의 면모를 갖추게 한 것 같아 흐뭇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일까요? “임금들과 함께 다윗 성에”(2역대 24,16) 묻힐 정도로 온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 임금은 완전히 딴사람이 됩니다. 목숨을 건져 준 생명의 은인, 혼신을 다한 삶의 스승,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고모부의 은혜를 배신합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 사제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전하는 간언에 발끈하여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을 내리니까요. 요아스 임금이 어찌 그리 변한 것일까요? 요아스 임금처럼 일등이라는 감옥에 갇힌 이 시대의 아이들 인간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근본 시기는 어린 시절입니다. 모든 어린이는 환경에 따라 마음이 자라고 인격이 형성됩니다. 어린 시절을 인생의 보석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달리 불행했던 요아스의 환경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갇힌’ 상태에서 없는 듯이 지내야 했던 감정의 발로라 짚어집니다. 그 감정을 억누르고 지내느라 성격이 옳고 바르게 형성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기 적부터 어른들의 감시와 눈총 속에서 성장한 상처를 보게 됩니다. 신앙마저 힘 있는 고모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았을까 어림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절자, 요아스 임금의 처지를 마음 아프게 이해해 봅니다. 아이들은 천방지축이어야 마땅합니다. 아이들은 가두어 양육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악에서 보호하기 위해 갇히고,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사육되는 아이들이 염려됩니다. 단지 ‘악한 아탈야’의 눈길에서 감추겠다는 어른들의 발상에 곪은 상처가 어떤 병폐를 낳을지 무섭습니다. 성적이란 사슬에 묶여 일등이란 감옥에 갇힌 아이들의 감성이 세상을 더 험악하게 할지 몰라 걱정됩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 행태가 자기 꿈을 소신껏 펼치지 못하도록 하는, 일평생 남과 비교하며 노심초사하는 못난이를 양산하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마침내 자존감을 잃고 작은 것에 우쭐대고 시시한 것에 기가 죽어 형편없이 살게 될 것만 같아 심히 가엾습니다. 언제부턴가 부모들이 아합의 딸처럼 포악해지기를 마다치 않고 편협함으로 자녀들 안에 심긴 주님의 선물을 빼앗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진심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그분 정의와 사랑에 돌을 던지는 패악입니다. 당신 말씀 외의 것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그분을 향한 ‘변절과 배신’입니다. 요아스 임금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은 행위가 하느님께 결코 잊지 못할 큰 사건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까마득히 먼 훗날 예수님의 입에서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마태 23,35)이라는 말씀이 나올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관점에서 벗어나 세상 이론에 솔깃할 때, 그것이 요아스의 변절이라 믿습니다. 요아스를 통해 배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에 명약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를 구하고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일이 영혼의 버릇이 되고 삶의 습관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스스럼없는 행위가 하느님께 길이 기억되는 복의 소재로 쓰이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장재봉 스테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