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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욥기 - 하느님, 힌트라도 좀 주시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009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하느님, 힌트라도 좀 주시죠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두고 사탄과 내기하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귀띔이라도 좀 해 주셨더라면!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도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시편 90,10)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욥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겪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잘 낫지 않는 질병으로 벌써 2년 넘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잘 모르기에 다 나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뿐이죠. 제가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리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인 모르는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잘 견딜 때 신앙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지금 저는 잘 참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4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론인 1-2장과 결론인 42,7-17은 설화를 담은 산문입니다. 이 산문의 틀 안에 시적 대화가 삽입된 형식으로 운문이 펼쳐집니다(3장-42,6). 욥기의 주요 부분은 사실상 운문에 속하는 여러 말씀입니다. 그러나 설화 내용은 운문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산문에 나오는 욥은 믿음이 강하고 의로운 사람이지만, 운문에 나오는 욥은 하느님께 자기의 무고함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욥기는 구성 형식과 내용이 달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욥이 고통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는 기원전 이천 년대 말기 근동 지방의 현인들에게 구전되어 오다가 왕정 시기에 히브리어로 옮겨지고, 유배를 겪은 한 시인이 고통당하는 욥의 이야기로 엮은 것으로 봅니다(《주석 성경》 1364쪽 참조).

 

 

1,1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머리말인 1,1-2,13에서 첫 단락(1,1-5)은 욥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줍니다. 1,6-2,13에는 하늘과 땅이 교차되는 다섯 개의 장면이 나오죠. 저자는 전설을 들려주듯 도입부를 시작합니다. 욥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아니라 서부 셈족의 흔한 이름 중 하나입니다. 욥은 요르단 동편 우츠의 반유목민 족장으로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다”(1,3)고 합니다. 욥은 아들 일곱에 딸을 셋 두었으며, 재산으로 양과 낙타가 각각 칠천 마리, 삼천 마리나 있습니다. 7은 완전수인데 3을 더하면 10이라는 완전수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10은 많다는 뜻이며, 많은 자녀와 재산은 하느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낙타는 이동 수단, 겨릿소는 농경 생활, 양은 목축 생활을 엿보게 합니다. 그 밖에 당시 자가용처럼 이용하던 나귀도 오백 마리나 있습니다. 욥의 많은 재산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재산에 비길 수 있습니다.

 

1,1에서 욥의 인격이 묘사된 ‘흠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탐(tam)’이라 합니다. 이는 ‘완전한, 옳은’이라는 뜻이며 언제나 도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올곧다’는 말은 ‘야샤르(yashar)’인데, ‘의롭다’는 뜻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 번역되었죠. 따라서 욥의 의로움은 ‘올곧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나의 종”(1,8)이라는 ‘최고의 칭호’(E. 머피)를 부여하시고, 이 세상에 다시없는 사람으로 두 번이나 인정하십니다(1,8; 2,3 참조). 그의 자녀들은 풍요롭게 지냈는데(1,4 참조), 욥은 혹시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는 아들들(딸들이 아닌)을 하나하나 불러다가 그들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1,5 참조).

 

 

1,9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에게 난데없이 시련이 찾아옵니다. 사탄(적대자)이 하느님께 응수합니다. 어떤 대가가 있어 욥이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이죠. 그가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많은 자녀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1,10 참조). 이런 사탄의 냉소적 판단은 고대 종교의 핵심에 속합니다(J. L. 크렌쇼). 욥기에서 사탄은 정체가 불확실한 모습으로 관찰자 역할을 합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하느님의 울타리를 없애고 그의 모든 소유를 앗아가면 욥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1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욥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1,12 참조). 욥을 믿으시는 하느님의 두 차례 모험이 시작됩니다. 욥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습니다. 1,13-20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하느님의 불(벼락)과 큰 바람, 땅에서 일어나는 이민족들의 침략으로 두 번씩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욥의 모든 울타리가 하나씩 무너져 가고 그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재앙임을 알리는 단조로운 두 구절이 반복됩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1,15.19).

 

 

2,10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하루는’(1,6.13; 2,1)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께서 욥의 뼈와 살을 치도록 허락하신 후(2,5 참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탄이 하느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욥에게 고통을 주러 갔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욥을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쳤습니다(2,7 참조). 이 모습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2사무 14,25)는 것과 대조됩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종기와 고름이 난 몸을 긁습니다. “하느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렇게 불평할 만도 한데 욥은 초인이 된 듯 모든 고통을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2,10).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은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는 듯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욥이 하느님을 저주하도록 하는 것이었죠. 사탄은 하느님께서 욥의 소유와 뼈와 살을 치면 틀림없이 욥이 하느님을 저주하리라 장담했습니다(1,11; 2,5 참조).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옛날 하와가 뱀의 말을 믿는 바람에 하느님께서 거짓말쟁이가 되신 것처럼(창세 3장 참조), 고통을 못 이긴 욥이 하느님을 저주했다면 욥을 믿으신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행동으로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아(1,22; 2,10 참조) 하느님께 승리를 안겨드립니다. 욥을 바라보신 하느님의 시각이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가 문제가 됩니다. 그가 사탄 편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탄의 속셈이 욥의 아내가 한 말로 드러난 것 같습니다. 흔히 ‘처자식을 다 잃었다’고 하면 극심한 고통을 연상하게 되는데 욥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네요. 살아 있는 아내가 욥에게 고통을 줍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2,9). 그러나 욥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고 속 깊게 말합니다. 욥의 아내가 한 말은 도전하는 욥의 태도에 연결 고리가 됩니다. 욥의 불행이 친구들에게 전해집니다(2,11 참조).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그의 몰골이 너무도 비참하여 멀리서 이레 동안 바라보면서도(레위 13,45 참조)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2,13 참조). 그들은 욥의 독백(3장 참조) 후에 4장부터 순서대로 링에 올라갈 것입니다.

 

결론 부분(42,7-17)은 ‘하느님의 종’ 욥이 회복되고 더 큰 복을 누리는 상선벌악으로 끝납니다.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42,16-17)고 쓰인 것으로 봐서 욥은 젊었을 때 고통을 겪었네요. 긴 수명도 하느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 후에야 용서를 받습니다. 친구들이 하느님께 무엇을 잘못했는지, 욥이 항의와 탄원을 하는데도 어째서 하느님께서 그를 인정하였는지(42,8 참조)는 다음호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욥기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지만 원인이나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통을 당하는 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느님 안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면 자기 삶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지, 어떻게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지 욥기를 묵상하며 함께 기도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 김경랑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이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삶의 현장인 수지 가톨릭성서모임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열매 맺으며 살아간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김경랑 귀임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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