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하까이서] 하까이 예언자와 함께 보내는 송년의 밤 1년을 함께 걸어온 이 꼭지의 제목은 ‘말씀과 함께 걷는다’입니다. 말씀과 함께 걷기 위해서는 말씀이 발자국을 어디로 내딛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고, 말씀이 발자국을 먼저 내딛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상(心象)은 하까이 예언자가 유배 후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하였던 메시지와 깊이 연관됩니다. 둘 다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삶의 우선순위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했던 때는 바빌론 유배 이후 시기입니다.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 요엘서와 요나서, 말라키서, 그리고 제3이사야서가 유배 후의 상황을 반영하는 예언서입니다. 유배 이후 시대의 주된 관심사는 성전과 공동체의 재건이었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가 바빌로니아에 유배 와 있던 민족의 귀환을 허락하는 것으로 유배 시기는 종결됩니다. 유배민의 귀환에 관한 정보는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배 이후에 공동체는 재건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배를 가지 않고 그 땅에 계속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귀환민의 정착을 환영하지 않았고, 귀환민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재건 과정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에즈라기에 의하면 이런 갈등으로 인하여 첫 번째로 귀환한 무리가 재건할 성전의 기초는 마련하였지만 성전 재건은 한동안 중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 집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어 왔지만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에즈 5,16) 기원전 520년경 즈루빠벨 총독 때 가서야 성전 재건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고, 기원전 515년에 성전이 완공됩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까이는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가 다스리던 시절에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하까이 예언서에는 그가 기원전 520년에 선포한 예언 메시지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의 수신자는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입니다. 그의 첫 번째 메시지(1,2-15ㄱ)는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던 때에 선포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유다 공동체가 현재 겪고 있는 빈곤과 흉작은 영적인 혼수상태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며, 만약 그들이 신앙의 열성을 되찾고 성전 건축에 힘쓴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전의 현존이야말로 땅이 번영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유다 백성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하느님을 섬기면 의식주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은 성전 재건보다 저마다 자기 삶을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그들은 ‘판벽으로 된 집’을 짓고, ‘제 집을 돌보는 일’에 골몰하였습니다(1,4.9 참조). 판벽으로 된 집이란, 먼저 돌로 집을 지은 후 그 벽을 널빤지로 덧댄 집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값비싼 고급 저택을 말합니다. 또 그들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수확을 늘리고자 고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뭄이 들이닥쳐 소출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1,6). 하까이 예언자는 이들에게 삶의 우선 순서를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 곧 주님을 찾는 일을 먼저 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까이 예언자의 독려를 받고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는 성전 재건 작업을 착수하게 됩니다(1,14 참조). 예언자가 궁핍한 처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에게 던지는 일갈(一喝)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가진 물질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물질을 주시는 하느님 때문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성전 재건과 새로운 시작 예언자의 둘째 메시지(1,15ㄴ-2,9)는 즈루빠벨과 예수아, 그리고 온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초막절 축제의 마지막 날에 내린 말씀입니다. 옛 성전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 그들이 짓기 시작한 성전은 ‘있으나마나 한 것’(2,3 참조)으로 여겨질 만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하라고 독려합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장차 ‘세상의 부가 이 성전으로 흘러들어오게 될 것’(2,7-8 참조)이며,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2,9)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예언자의 셋째 메시지(2,10-19)는 기원전 520년 12월 중순에 내린 것으로, 다시 한 번 성전 건축을 장려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공동체에 성전이 없다면 그 땅은 여전히 부정한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예언자는 성전을 짓기 시작하기 전에 그들의 소출이 형편없었던 것, 마름병과 깜부깃병과 우박이 농사를 망치게 했던 것도 다 땅이 부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언자는 성전의 기초가 놓인 날부터 그들의 소출이 다시 늘어나게 된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그 땅의 부정을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성전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도록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19 참조). 예언자의 마지막 메시지(2,20-23)는 즈루빠벨에게 내린 것으로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의 권세를 없애실 것이며, 즈루빠벨을 인장 반지처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23 참조). 여기에서 인장 반지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윗의 후손이 임금의 자리에 다시 오르는 결정적인 구원의 시기가 도래하리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하까이 예언자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 보려고, 인생의 갖가지 짐을 홀로 져 나가려고, 너무 큰 긴장을 안고 살지 않았는가? 혹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드리며 살았는가? 내 삶이 조금 더 정리된 뒤에 주님을 찾겠노라고 헛되이 약속하며 내 삶에만 골몰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늘 나와 함께하시지만 때로는 보이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 보려고 조금은 더 애써 보았던 한 해였는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주님은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주님의 말이다”(1,7.13).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내 시선이 어디에 있었든지 주님은 늘 우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주님께 한 번쯤은 시선을 고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제대로 돌려 드리는 새로운 한 해를 설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 김영선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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