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호세 3,1) 아모스는 양을 치고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었다고 했지요. 베텔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중에도 어쩌면 먼 남쪽 트코아에 가꾸어 놓은 돌무화과나무 생각이 나고 양 떼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를 던져두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선 아모스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는(아모 3,8 참조) 하느님을 거스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혼인할 나이에 이른 호세아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젊은 여자와 혼인하여 아내가 자기만 사랑해 주기를 당연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호세아의 기대를 저버리십니다. 그의 소박한 꿈을 접게 하십니다.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호세 1,2) 다른 예언서와 달리, 역사적 배경을 다음으로 미루고 호세아의 개인 체험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세 1,2에서는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첫 말씀이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는 명령이었다고 전합니다. 뜻밖의 말씀, 전혀 상식 밖의 말씀이지요. 호세아의 혼인 생활은 1-3장에서 여러 가지로 전해지는데, 세부 사항이 일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3장에서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호세 3,1) 하고 말씀하시지요. 이 경우 호세아의 아내가 처음부터 창녀 출신은 아니고 본래 호세아의 아내였는데 혼인 후에 간음을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둘 중 어떤 경우이든 호세아의 아내는 남편에게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여자와 혼인하라고 호세아에게 명하셨습니다. 호세아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호세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명을 받기 전에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 말씀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죽을 때까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명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 외에, 그 명령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호세 3,1) 호세아가 간음을 저지르는 아내를 내치지 않고 다시 데려다가 사랑해 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호세 3,1에서 밝혀집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 이 구절이 호세아의 사랑과 혼인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호세아가 아내에게 한 일은, 개인적으로 충실한 부부 관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세 1장에서 ‘고메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호세아의 아내는,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제부터 호세아의 혼인은, 이스라엘 역사의 각 단계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에서 왕국을 세우고 살면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어난 일이지요. 그 전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다정하게 첫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때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너의 하느님이다”(호세 12,10; 13,4)라고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어 이집트에서 불러 내셨고(호세 11,1 참조),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젊은 여자와 같았습니다(호세 2,17 참조).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을 주는 내 애인들을 쫓아가야지”(호세 2,7) 하며 주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호세아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것은(호세 2,4-7 참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주님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풍산신(豊産神) 바알이 그들에게 먹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준다고 믿으며 바알을 숭배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에 머무르던 이스라엘에게는 주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신명 32,12: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시고 그 곁에 낯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농사는 농사 전문 신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폭풍우와 비의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호세 2,7)을 주는 분이 누구신지 헷갈렸습니다.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을 주는 내 애인들을 쫓아가야지”라는 말은, 그것들을 주는 것이 “내 애인”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신들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건포도 과자는 그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더구나 가나안 사람들은 봄이면 풍산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마다 신들의 결합을 나타내는 성적(性的) 예식을 거행하기도 했으므로, 그러한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남편에게 불충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호세아가, 자신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들을 따라간 아내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징계의 시간을 갖게 했듯이(호세 2,11-15 참조),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랑의 유대를 끊어버린 후에는 징벌의 단계가 뒤따릅니다.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이 애인들이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십니다. 애인들에게 아무리 매달려도 이스라엘은 양식과 물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제야 “첫 남편에게 되돌아가야지”(호세 2,9) 하면서 그 모든 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호세 1장에 나오는 호세아의 자녀 이름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내치심을 의미합니다. ‘이즈르엘’은 이제벨과 아합 집안이 모두 죽임을 당한 곳으로(2열왕 9,36-10,11 참조), 이스라엘의 죄악이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로 루하마’는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여자’, ‘로 암미’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으려 하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간 결과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무질서를 겪게 될 것이고, 결국 아시리아가 그들의 임금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이 될 것입니다(호세 11,5 참조).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 “그러나”(호세 2,16).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자꾸만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그렇게 했으니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만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배신을 겪으시면서도, 인간에게 버림을 받으시면서도 ‘그러나’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호세아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하여 불충한 아내를 다시 맞아들입니다(호세 2,21-25 참조). 하느님 역시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면서도 애절히 사랑하시기에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오시고, ‘로 루하마’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이름을 ‘루하마’, 즉 ‘가엾이 여김을 받는 여자’로 바꾸어 주시고 ‘로 암미’라는 이름을 ‘암미’, 즉 ‘내 백성’이라고 바꾸어 주십니다(호세 2,25 참조).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뀝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나타낸 첫 예언자입니다. 서로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부부 관계가,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예례 11,4; 에제 36,28)라고 표현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과 가장 유사한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갈라질 수 없듯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신다는 것, 호세아는 바로 이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가장 나쁜 아내를 맞아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그 여자를 사랑해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등을 썼고, 《약함의 힘》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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