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진실도 신의도 하느님을 아는 예지도(호세 4,1 참조)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의 혼인을 통하여 당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당신을 저버리고 도망가려 해도 당신은 이스라엘을 끝없이 부르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했기에 하느님께서 그런 말씀을 전하려 하셨을까요?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호세 1,1) 호세 1,1에서는 호세아가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시대에” 활동했다고 전합니다. 아모 1,1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유다 임금 우찌야 시대에 환시를 보았다고 한 반면, 호세아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린 것은 남왕국 유다의 임금들로 치자면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호세 1,1)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산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히즈키야가 임금이 되던 때까지 가려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도 예로보암 다음으로 즈카르야, 살룸, 므나헴, 프카흐야, 페카, 호세아 시대까지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의 내용을 봐도 호세아는 아모스보다 더 늦게까지 활동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는 나타나지 않기에,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조금 전까지 활동했다고 봅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열두 소예언자 가운데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한 사람은 아모스와 호세아 둘뿐인데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었으므로, 실제로 북왕국 출신으로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는 호세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때만 해도 북왕국 이스라엘은 태평했습니다. 멸망이 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에는 혼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임금들의 이름만 보십시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로보암, 즈카르야, 살룸, 므나헴, 프카흐야, 페카, 호세아, 남왕국 유다의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임금을 겪을 수 있을까요? 아모스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서(2014년 2월호 참조), 예로보암 2세는 40년 동안(기원전 787-747년) 왕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다음 25년 동안 여섯 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대부분이 살해되거나 폐위되었기 때문이지요. 아시리아의 세력이 점점 커지던 시기에, 임금이 아시리아에 맞서면 친(親)아시리아 세력이 임금을 죽이고 임금이 아시리아와 화친하려고 하면 반反아시리아 세력이 임금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왕위에 6개월 있다가 살해되고, 살룸은 1개월 만에 살해되는 등 내정이 더할 수 없이 불안했습니다. 지금쯤 “아, 복잡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름 몇 개는 건너뛰고 읽으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점점 커져 가는 아시리아의 세력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주민들을 고소하신다”(호세 4,1) 그렇지 않아도 헤매는 이스라엘에게 호세아는, 주님께서 그들을 고소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뜻밖의 말씀일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다른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잘못을 돌아봐야 한다고 일깨우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고소의 내용은 “진실도 없고 신의도 없으며 하느님을 아는 예지도 없다”(호세 4,1)는 것입니다. 5장 이후에 가면,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힘을 막아 보려 애를 쓰는 모습이 보입니다. 전에는 원수로 여긴 시리아와 손을 잡고, 남왕국 유다에게도 함께 아시리아에 저항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군사적 대책을 마련합니다. 마치 전쟁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한편 유다는 살아남기 위하여 오히려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유다는 일단 멸망을 피하지만 아시리아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이든 유다든, 그들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었습니다. 문제는 군사력이 없고 외교 수완이 부족한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 신의, 하느님을 아는 예지’, 그것이 없기 때문에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땅은 통곡하고 온 주민은 생기를 잃어 간다.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죽어”(호세 4,2-3) 갑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바다의 물고기들이 죽어 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삶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진실하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으며 살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노아의 홍수도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악에 빠졌기 때문에, 그 사람들만 멸망한 것이 아니라 온 땅이 물에 잠기고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짐승도 다 죽었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세상의 존망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온갖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지요(창세 1,26 참조).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의미합니다. 인간만이 이 지구를 망쳐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짐승이라 한들 그 짐승이 지구를 멸망하게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구가 멸망한다면 인간의 탓입니다. 호세 4,3에서 말하는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죽어 간다”도 그런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의 이러한 직관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로 이해됩니다.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이 땅은 통곡”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합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죄악 때문에 땅이 괴로워한다는 것, 이스라엘이 비틀거리게 된다는 것, 이것이 멸망의 위험이 다가오는 이스라엘에 살았던 호세아의 선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병을 고치려고 아시리아로 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호세 5,13 참조). 아시리아에, 이집트에, 군사력에 기대려고 하는 것은 모두 우상 숭배의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호세 6,1) 사제, 백성, 정치 지도자 등 여러 계층에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자, 주님께 돌아가자”(호세 6,1)는 이스라엘의 말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회개의 기도 같지만, 위에 파란색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회개’라고요.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 싸매 주시리라”(호세 6,1). 문맥에서 잘 이해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그냥 이 구절을 읽는다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연히 이스라엘을 살려 주셔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하실 수 없다, 멸망하게 하실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자동판매기처럼 만드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쩌면 좋겠느냐? …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호세 6,4). 이스라엘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말로만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이고,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는 것이지요(호세 6,6 참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저 당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고 말하면 뭔가 복잡해 보이지만, 글자 그대로 옮기면 그저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까요? 호세아의 아내가 언제 호세아의 사랑을 알았을까요? 집을 나가 본 다음에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을 겪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착각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내가 너희를 어쩌면 좋겠느냐?”는 하느님의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호세아가 아내 때문에 한숨을 지었듯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때문에 한숨을 지으십니다. 누구도 그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할 깊은 한숨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등을 썼고, 《약함의 힘》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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