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내 하소연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하바 2,1) 멋있는 예언자 하바쿡(이는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바쿡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바쿡이라는 이름을 안다 해도, 어느 시대 어떤 배경에서 살았는지는 거의 모를 것입니다. 사실 그 시대는 어지러운 시대였고, 그가 선포한 내용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가 살던 시대를 먼저 살펴본 다음에 왜 하바쿡이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하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하바쿡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하바 1,1에서 그저 “하바쿡 예언자가 환시로 본 신탁”이라고 말할 뿐,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전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고 시대를 짐작할 뿐이지만, 사실 그것도 분명치 않습니다. 책의 내용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하게 엮여 있고, 예언자는 외세의 억압과 국내의 불의를 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질문을 던지지만,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임금 이름이라도 한두 번 언급되면 참 좋겠지요. 아쉽게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와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라면 “이제 내가 사납고 격렬한 민족 칼데아인들을 일으키리니”(1,6)라는 언급입니다. 칼데아인들은 바빌론인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험 부담은 있습니다. 혹시 본래의 하바쿡서에는 칼데아인들이 언급되지 않고 그저 ‘사납고 격렬한 민족’이라고만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그 본문을 바빌론인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칼데아인들’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한 구절을 제외하면 하바쿡서에는 어떤 이름이나 구체적 사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3장밖에 안 되는 이 책에서 1장은 주로 외세의 억압에 대해, 2장은 외세가 아니라 유다 왕국 자체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3장은 전혀 다른 전망을 열기 때문에(3장은 다음 달에 읽겠습니다)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두고 이야기하는지…. 책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대상을 일관되게 말하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한 번에 형성되지 않고 여러 시대를 거쳐 새로운 내용이 점점 덧붙여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가 많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본문이 완성된 다음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바쿡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악을 저지르든 그를 대상으로 하바쿡서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난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내가 사납고 격렬한 민족 칼데아인들을 일으키리니”(1,6)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바쿡의 시대를 그려 본다면, 그것은 아시리아의 지배가 끝나고 바빌론이 패권을 잡기까지인 기원전 7세기 말이 될 것입니다. 지난 호에 나훔 예언서를 읽으면서 아시리아가 얼마나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른 민족들을 억압했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아시리아가 기울어 갈 때, 잠시 이집트와 바빌론이 힘을 겨루었습니다. 하바쿡서에서 하느님이 칼데아인들을 일으키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마도 바빌론을 통해 이집트를 치시겠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후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아시리아가 멸망하고 이집트의 기세가 꺾인다고 해서 유다가 외세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609년에는 요시야 임금이 아시리아를 도우러 가던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와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기원전 604년에는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이 이집트를 물리쳐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닌 바빌론이 패권을 잡고 다시 유다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유다에 영향을 미치는 외세의 이름만 아시리아, 이집트, 바빌론으로 교체될 뿐 억압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탄원과 응답 이런 배경에서 1,2-2,5에서는 예언자와 하느님의 대화가 두 차례 이루어집니다. 서두에서 예언자는 폭력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을 보면서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1,2) 하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악에 무관심하신 듯 보이는 것이 예언자를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응답에서 예언자의 상황을 재구성한다면 그는 아시리아의 지배와 그 뒤를 이은 이집트의 압력, 그리고 끝없는 외세의 영향 하에 흔들리는 유다의 실정 때문에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유다 왕국 안에도 친(親)아시리아 세력, 친(親)이집트 세력, 친(親)바빌론 세력이 모두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부르짖는 하바쿡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첫 번째 응답은, 당신께서 바빌론을 일으키실 것이고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꺾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바쿡은 바빌론이 하느님의 도구라고 봅니다. 사실 바빌론이 아시리아와 이집트를 꺾는다는 것은, 그 나라들이 저지른 불의에 대한 징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빌론이 정도를 넘어선 폭력과 불의를 자행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악을 다른 악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바쿡서는 거기까지 말하지 않지만, 더 긴 전망에서 보면 아시다시피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는 아시리아도 이집트도 아닌 바빌론이었습니다. 두 번째 탄원과 응답 하바쿡의 두 번째 탄원은, 그가 하느님의 첫 번째 응답으로 만족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1,13)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을 심판의 도구로 세우셨지만, 이제 바빌론이 아시리아나 이집트와 다를 바 없이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집어삼키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말없이 계실 수가 있습니까? 하바쿡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수의 악행이 아니라 그 악행을 묵인하시는 듯한 하느님 때문에 괴로워하며 부르짖습니다. 거룩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악을 보며 잠잠히 계실 수 있습니까? 그는 보초처럼 초소에 서서 하느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2,1 참조). 제가 하바쿡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입니다. 하바쿡은 기다립니다. 그는 보초처럼, “성벽 위에 자리 잡고”(2,1) 살펴보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고야 말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 적당히 기다린 뒤 전화를 끊고 다시 걸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단 한 번 탄원하고 질문을 던졌으면, 대답을 받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깔고 앉아 버팁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버티는 하바쿡에게 하느님께서 두 번째 응답을 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정의가 즉시 눈에 보이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제하고 환시를 기록하도록 하십니다. “정해진 때”(2,3)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자에게 “늦어지더라도 너는 기다려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뻔뻔한 이들을 내치시지만,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2,4)고 약속하십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에도 인용되었고, 루터가 의화(義化)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하바쿡서 본문이 그리스어로 된 로마서 본문과 차이가 있지만, 하바쿡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의인이 그분의 약속을 믿고 충실하게 기다리면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약속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성벽 위에 자리 잡고 하느님께서 응답하시는지 지켜보는 하바쿡. 그는 멀리서 적군이 나타나면 알아보려고 높은 곳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처럼 밤낮으로 하느님께 온 신경을 기울입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때를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 끝없는 질문을 품게 해도, 하느님께서 언젠가 내 하소연에 응답하시리라 믿고 끝까지 하느님께 눈길을 고정시키는 모습입니다. 하바쿡서에 나타난 어떤 질문이나 대답보다 그 끈질긴 기다림이 제 마음에 남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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