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 줄 그날(요엘 4,1) 메뚜기 떼 재앙을 보며 주님의 날을 예고한 요엘은, 그러면서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 주시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도 될까요?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예레미야와 달리 요엘에게 메뚜기 떼 재앙이 있었다면 예레미야에게는 가뭄이 있었습니다(예레 14-15장 참조). 그 가뭄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예고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단식하고 제물을 바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도 않겠다 하셨고, 예레미야에게마저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당신의 결정을 결코 돌이키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가뭄은 더 큰 재앙, 전쟁과 질병과 다윗 왕조의 몰락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는 데 의지하여,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4)라고 했습니다. 물론 요엘 역시 주님의 날이 무서운 날이라는 것을 알았고, 메뚜기 떼 재앙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날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시크레(Sicre)는, 만일 예레미야와 요엘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예레미야는 구원의 희망을 품은 요엘을 거짓 예언자라고 비판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예레미야는 성전이 무너지지 않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백성을 현혹시킨다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2,12)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각종 예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 말과 대비됩니다. 두 예언자는 왜 이리 차이가 날까요? 그 대답은 아마도 예레미야와 요엘이 같은 시대의 예언자가 아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의 예언자입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심판 선고이지요. 그런데 요엘이 유배 후 예언자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특히 요엘이 다른 예언자들의 말을 계속 인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요엘과 예레미야의 관계는 대립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엘의 시대, 예루살렘은 이미 예레미야가 예고한 바와 같이 멸망했고 왕정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구원을 기다릴 때입니다. 요엘보다 앞서 에제키엘, 하까이, 즈카르야 등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이때 요엘은 이제 곧 약속이 성취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보면, 이스라엘 예언의 역사에서 요엘의 메시지는 위협이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었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요엘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 같은 재앙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분명 닥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엘은 심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다음에”(3,1)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합니다. 심판이,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무효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스라엘 예언의 역사를 볼 때에 잊지 않아야 할 사실입니다. 그 멸망은 구원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가 선포한 미래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3,1)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다음(2,12-17 참조), 마음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려 주실 복을 이야기하십니다. 곡식, 햇포도주, 햇기름, 무화과, 포도 등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2,18-27 참조). 가을비와 봄비가 내리고, 메뚜기가 갉아먹은 것도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2,18)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보통 ‘질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을 일컬어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할 때에 사용되는 그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땅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것이고 당신께 속해 있어야 하는 땅이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땅을 누가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되찾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을 되찾으시어 “주 너희 하느님이 바로 나요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음을”(2,27) 알게 하십니다. 이어서 나오는 “그런 다음에”(3,1)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심판이 모두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 심판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을 묘사하는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는 것입니다. 보통 주님의 영은 판관, 임금, 예언자 등 특정한 이에게 내립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누구에게나 당신의 영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은 결국 특정한 성별과 나이와 신분이 한정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시를 본다는 것(3,1 참조)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말씀을 전달받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되는 것이지요. 세 장면을 연결 지을 수 있겠습니다. 먼저 민수 11,29입니다. 70명의 원로가 주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게 되었을 때, 진영에 남아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주님의 영이 내려 그들도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막으려 하는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예언한다는 것,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긴밀한 소통을 이룬다는 말이겠지요. 이렇게 모세가 바라고 요엘이 예언한 것이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여러 언어로 말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 사도는 바로 요엘 3장을 인용하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사도 2,16-21). 성령께서 오신 때가 예언자들의 기다림이 성취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3,5) 그날을 예고하는 것이 하늘과 땅의 징조입니다.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3,4) 변하는 우주적 변화는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훗날 묵시문학에서 자주 사용될, 종말이 다가옴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초점은 주님의 날과 그 심판이 아니라, 그 후의 일들입니다. 스바니야서에서 우리는 “남은 자들”(스바 2,7)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지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시온 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엘은 이를 크게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내려 주실 때에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3,5). 스바니야서에서는 주님의 날에 대비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고 정의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스바 2,1-3 참조). 이제 요엘서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다른 어떤 신이 아니라 그분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남은 자의 수가 얼마나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이미 많은 이가 심판받을 것이 전제되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라는 표현은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남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전에 다른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시온 산에는 남은 자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내릴 것입니다. 요엘은 그 믿음을 품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세상이 무사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심판이 선고될 이유를 보고,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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