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집을 지어라(하까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1,8). 이 말씀을 들으면,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달려가 성당 수리를 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릅니다. “집을 지어라”라는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은 예언이 선포된 그 시대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하고, 그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1,1) 하까이서에는 예언자 하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하까이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1,1)고 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자신에 대해 전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말씀이 내린 날짜는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말씀은 하까이가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부터 그 해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2,10)까지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날짜는 그의 활동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됩니다. 허구로 만들어진 날짜가 아닌 듯하고, 그의 예언 내용이 당시의 상황과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520년이라고 했지요. 유배가 끝난 때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정복된 다른 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펴서, 유배되어 있던 유다인들에게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내용의 소위 ‘키루스 칙령’을 내립니다(에즈 1,1-4 참조). 하지만 바빌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모두 귀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고, 유배된 이들 중 일부는 바빌론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팔레스티나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스바차르의 인도 하에 귀향한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고, 예루살렘의 재건을 크게 진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도성은 많이 파괴되었고, 유다의 주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사마리아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윗 집안의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의 지도로 또 한 집단이 귀환합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들은 처음에 열성을 내어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을 복구하려 하지만, 빈곤과 흉작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장의 생활을 헤쳐 나가는 것이 급선무가 되고,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점점 미루는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까이 예언자는 우선 성전을 재건할 것을 주장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한다면 구원의 시기가 도래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집을 짓는 일”(1,14) 하까이서의 내용을 보면, 먼저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 내린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하까이를 통하여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성전을 재건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추수를 해도 얼마 거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은 꾸며 놓고 살면서 성전 재건은 미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1-11 참조). 제가 학생 때,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끼리 “이거 판잣집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판벽은 맨 흙벽돌이 아니라 그 위에 장식으로 덧씌운 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단칸방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집은 멋지게 꾸며 놓고 사는 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1,15) 즈루빠벨과 예수아, 그리고 백성은 성전을 짓는 일에 착수합니다(1,12-15 참조). 예언서를 읽으면서 백성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1,12)는 구절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2,1), 곧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났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시 성전 재건을 독려하십니다. 당신께서 그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평화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2,1-9 참조). 2,10-19을 같은 날짜에 주어진 말씀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둘을 분리하거나 2,15-19을 다른 위치로 옮길 것인지 등에 대하여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본문을 현재 상태에 두고 2,10의 날짜 표시가 2,19까지 적용된다고 보면, 그 단락은 모두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꼭 석 달 후인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2,10) 내린 말씀이 됩니다. 하까이는 사제들에게 질문을 하고, 백성 모두와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 이전에는 모두 부정했지만 성전 재건을 시작함으로써 그 모든 부정을 씻고 축복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그들을 새롭게 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2,23) 마지막으로 2,20-23에서는, 같은 날 하까이가 주님에게서 즈루빠벨에게 전할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의 왕조와 권세를 없애시고 즈루빠벨을 받아들여 선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짧은 예언서에 담긴 짧은 구절이지만, 이 단락은 여호야킨의 손자 즈루빠벨을 통해 다윗의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룩할 이상적 임금에 대한 희망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하까이는, 즈루빠벨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그 희망의 실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희망은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보게 될 것처럼, 즈루빠벨은 어느 시점에서 사라지고 이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처음에는 예수아 대사제에게 집중되고, 그다음에는 장차 올 메시아에게로 옮겨 갑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살아있으며, 그 약속은 처음에 사람들이 이해했던 방식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재건의 의미 같은 시기의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를 비교하면, 두 예언자 모두 성전 재건과 메시아 희망을 포함한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귀향 후 예언자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두 가지 주제 가운데 하까이는 성전 재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것이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부터 주님의 성전에 기초를 놓은 날부터 생각해 보아라. …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리라”(2,18-19). 그는 제3이사야와 같이 정의의 실천을 중시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이는 대대로 헛된 경신례를 비판해 온 예언자들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성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에 대해 태도를 취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1,2)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보다 앞세운다는 것, 경제 문제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한 가지”(루카 10,42 참조)는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실을 잊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하까이 예언서를 잘못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성전 건물을 짓는 데 착수하면 복과 풍년이 따르며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기복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포기하고 하느님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건물을 고쳐 지으라는 뜻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우라는 뜻까지 포함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집을 지어라”(1,8) 하고 이르신 말씀도 만사 제쳐놓고 성전 건물을 짓는 데 매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의 가난을 통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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