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인가?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말라 3,1). 말라키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실제로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는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사자 ‘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말라 3,1에서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라고 할 때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흔히 1,1에서 “말라키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내리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도 말라키는 어떤 한 예언자의 이름이 아니라 가명으로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라키서에서는 말라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타난 사회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다는 언급 등을 근거로, 이 책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전 그 사이의 시기, 아마도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작성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보았던 즈카르야서의 끝 부분과 마찬가지로, 예언서들을 마무리하려 했던 어떤 편집자에 의해 엮였을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이 작은 책에서는 경신례와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 등 불안정했던 시대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구조입니다. 머리글(1,1)과 후기(3,22-24)를 제외하고 보면 말라키서에는 여섯 개의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1,2; 3,21).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여섯 가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각각의 논쟁은 거의 일정한 형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먼저 예언자 또는 하느님께서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면 듣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런 다음 예언자가 처음의 진술을 확인하며 그에 따른 귀결을 이끌어 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우리를 사랑하기는 뭘 사랑하셨느냐고 따집니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사랑을 입증해 보이시는 것이지요. 이 논쟁들을 보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할 말이 참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책 전체의 내용이 일관된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데다 낱낱의 논쟁들이다 보니, 여기에서 논쟁 여섯 개를 하나씩 다루다 보면 읽기가 지루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말라키서 저자와 달리 나름대로 엮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논쟁(3,13-21)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3,13)라고 대꾸합니다. 나는 안 그랬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느님 편에서 증거를 대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3,14) 이것은 악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3,16)이 하는 말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잘 지내고 있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고 있으니(3,15 참조), 착하게 살고 하느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질문이 네 번째 논쟁(2,17-3,5)에서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오히려 악한 일을 하는 자를 좋게 보시고 그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2,17 참조). 그들이 잘 지내고 있으니, 공정하신 하느님이란 분은 계시지도 않는 듯합니다. 악인들이 잘되어 가는 세상이라면, 하느님은 선과 악에 대해 갚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아니 어쩌면, 누가 선을 행하고 누가 악을 저지르는지 보지도 않고 계시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눈속임도 해 봅니다. 다섯 번째 논쟁(3,6-12)에서는 십일조와 예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이 하느님을 약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두 명도 아닌 “온 백성이”(3,9)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지요. 백성이 예물을 잘 바치지 않았다면 사제들은 잘하고 있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두 번째 논쟁(1,6-2,9)에서는 사제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눈먼 짐승이나 절름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 “주님의 제사상이야 아무러면 어떠냐?”(1,7) 하고 말합니다. 훔친 짐승을 바치기까지 합니다(1,13). 아버지이시며 주인이신(1,6)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예언자들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경신례를 거부했던 것과 달리 말라키는 경신례 자체에 대하여 정성이 부족한 것을 비판하는데, 언제나 그 핵심은 주님의 이름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1,10 참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말라키서에는 사제들에 대한 고발이 상당히 깁니다. 그들은 경신례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율법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제들이 진리의 법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그들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합니다(2,6-9). 이스라엘은 마치 하느님께서 보지도 듣지도 않으시고 자기들이 속임수를 쓰는 그대로 넘어가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인들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이제 하느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다 보고 계시며 반드시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답의 핵심은 종말론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예언자들에게는 종말론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지요. 말라키서는 그 마지막 단계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이들이나 아무 차이 없이 그냥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3,18) 날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이름은 “비망록”(3,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망록은 다니엘서나 묵시록에서 말하는 생명의 책과 같은 것으로, 거기에 기록된 사람들의 행실에 따라 장차 심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보내실 사자(3,1)는 먼저 레위의 자손들 곧 사제들을 정화하실 것이고, 그들이 올바로 사제직을 행함으로써 유다와 예루살렘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경신례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화덕처럼 붙붙는”(3,19) 심판의 때에 악인들은 그날을 견디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술, 간음, 거짓 맹세, 가난한 이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하느님께서 분명 아껴 주실 것이며(3,17 참조), 그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3,20 참조). 말라키서에 나오는 여러 논쟁에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종말론적 전망입니다. 유배에서 귀향한 후에 활동한 다른 예언자들에 뒤이어 말라키는 “그날”에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며, 그러한 시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도록 촉구합니다. 특히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3,15)한다는 사실은 현세적인 인과응보의 원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고, 지혜문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였는데(시편 37; 73 등), 이에 대하여 말라키서가 제시하는 응답은 종말론적 심판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는 의인들에게 말라키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거짓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가 행하는 작은 일들의 무게를 잘 아십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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